일본여행기
◆일본 납골묘와 히로시마 원폭기념 공원을 보고 느낀 것 들..
한영구 실명입니다. 닉네임이 아닙니다
2007. 5. 5. 19:00
일본 납골묘, 히로시마 원폭기념 공원을 보고 느낀 것 들
이번 일본 시코쿠(四國-카가와현,에히메현,도쿠시마현,고치현. 4개의 현이 4개의 나라?또는
네번째 섬나라)여행에서 전국(戰國)시대의 군사유물인 마루카메성과 마쯔야마성을 보았고
이제 마지막으로 히로시마 원폭기념공원을 관광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전쟁의 역사적 유물
을 많이 본 셈이다.
세계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싸움과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 특히 말단 보병 졸개
들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지휘관의 호령을 들으며 죽어간 장면들이 여러 번 떠올랐다. 인
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點綴)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역사다. 전쟁으로 아주 많은 사람
들이 공포 속에서 죽어갔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3일안에 저승으로 가고, 육신은 간단하게
땅에 묻어버린다. 만약 전쟁으로 죽은 무수한 영혼들이 육지에서 떠돈다고 가정을 하면, 온통
귀신이 들끓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인간은 이승(지구)에서의 일
을 뒤로한 채 3일만에 저승으로 가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죽은 사람의 육신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다.
차도 대로변 집 앞 납골묘.
그런데 지구상에는 땅에 시신을 묻는 묘 문화를 아직도 고집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과
일본처럼 화장을 하여 납골당에 모시거나 산골하는 사람들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이번 여행
에서 많은 납골묘를 보면서 일본은 장묘문화의 선진국임을 확인하였다. 불교국가, 애니미즘
(animism)과 샤머니즘(shamanism)의 상징인 신사가 많은 나라지만, 모든 국민들이 죽은 육신
에 집착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화장을 하여 상징적으로 뼛가루를 납골묘에 모신다.
집 앞 납골묘를 이번 여행에서 발견하고 사진에 담았다. 집 앞에 납골묘를 만든 사람들이 인
간의 죽음에 대한 생각, 영혼과 육신의 결합과 분리에 관한 생각에서 가장 옳고 앞선 사람이
라고 여겨졌다.
일본은 천황이 존재하면서도 무사들이 수없이 많은 전쟁을 하여 승리한 장군들이 정치를 하
는 막부정치시대(에도시대)가 존재한 나라, 우리나라보다는 싸움과 전쟁을 많이 한 나라라고
여겨진다. 일본의 상징은 사무라이(싸움꾼) 그리고 칼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권총으로 싸움을 많이 한나라, 아직도 총의 자유로운 휴대가 법으로 보
장되는 나라다. 칼재비와 총재비가 전쟁을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1시 30분(하와이
시각 7일 오전 6시)겁도 없이 옛 칼재비가 옛 총재비를 먼저 공격했다. 쏘련(러시아)의 미
일전쟁의 개입을 막아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1945년 8월 6
일 오전 8시 15분에 투하하여 인구 34만3천여 명 가운데 7만여명이 즉사하고 이후 5년 안에
7만여명이 추가로 사망하였다.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
하하여(희생자 7만여명) 8월 15일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포를 얻어냈다. 히로시마는 과거의
인간죽음의 역사적 대 기록을 간직하고도, 인구 110만명의 큰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인간생명의 태어남과 죽음은 되풀이 되는 것,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지만, 중동 회교국가 사람들의 자살폭탄으로 너죽고 나죽자는 생각, 인명을 초개처럼 버리는
행위는 큰 죄악이라는 생각이 혼합이 되어 빙빙 맴돌았다.
끝으로 공원이나 도로 어디에서도 담배꽁초나 휴지조각을 발견할 수 없는 일본인들의 청결
성은 본 받아야한다. 서울 올림픽대로 주변에 버려진 담배꽁초들이 너무 많다. 정말 창피하
다. 호텔 화장실 변기의 물 담은 용기에 대변용과 소변용이 구별되어 있다. 비누도 1회용비
누대신 붙박이 눌러 쓰는 물비누로 대체된 호텔이 더 많다. 1회용 칫솔과 치약도 아주 작아
졌다. 그리고 식당에서 음식을 남기지 않는 소식 습관은 본받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식당에
서 음식남기는 습관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견해도 있다. 남는 음식으로
충분히 북한의 굶주린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다니, 참으로 못된 습관이다.
차도 대로변 집앞 납골묘
원혼을 위로하는 여러 색의 종이학.
[참고자료]
현재의 일본 각지에서 보이는 석탑묘(石塔墓)가 일반에게 보급된 것은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중기에 확립된 ‘사청제도(寺請制度)’란 제도로, 일반서민들이 사원에 단가(檀
家), 즉 신도로 등록하고 사적(寺籍)이 곧 호적(戶籍)과 같은 효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모
든 민중을 불교로 귀의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때부터 사람이 죽으면 사원에서 장례를 하고
납골묘를 설치하게 되었으니, 일본 불교를 ‘장식불교’라고 이름하게 되었으며, 절을 하까
[墓: はか]라고 할 정도로 사원은 민중이 평생 지친 몸을 최후에는 불교로 돌아가 의지하는
처소로 인식하게 되었다.
일본 불교는 ‘장식불사(葬式佛事)’를 거부하면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승
려와 사원은 쓸모없는 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을 정도로 ‘사청제도’는 온 국
민의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화장문화(火葬文化),먹는 음식을 남기지 않는 소식문화(小食文化), 모든 국민이 결벽증(潔癖
症)이 있을 정도로 청결한 것들은 명령을 어기면 죽음이 따르는 무인(武人)독재시대인 에도
시대(江戶時代)때부터 정착된 것으로 내 나름대로 추측을 해본다. 쇄국정책 등 부정적인 면
도 있지만 이처럼 긍정적인 면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