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3월 13일 수 아침 식사 전 보고와 기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흠숭 하올 삼위일체이신 우리 주님,
3월 13일 수요일 오전 5시 50분에 아침 식사 전 보고와 기도를 드립니다.
어제는
바깥 공기가 섭시 8도이지만 음산하게 춥습니다. 그러므로 어제도 하체에 살이 없는 저는 탄천을 걸을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실내에서도 거실에는 난방을 제가
하지 않음으로 실내용 방한화를 신고 있습니다.
방한화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내에서도 움직이지 않으면 별로 효과를 느끼지 못합니다.
방한화를 신고서 방송을 시청합니다.
어제도 잠을 일찍 오후 7시 30분에 잤습니다. 오른쪽 발바닥이 과거부터 혈액 순환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혈액 순환이 잘되지 않을 때, 오른쪽 발바닥은 차고 왼쪽은 찹니다.
그러면 잠이 빨리 오지 않습니다.
어제도 실내 방한화를 신고 실내를 움직인 덕분으로 오른쪽 발바닥이 덜 찹니다.
그러나 따뜻한 전기담요 효과로 잠을 잘 잡니다.
양쪽 다리의 발바닥 온도가 다름으로 오른쪽 다리 온도를 높이려면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일찍 자더라도 30분 정도가 지나야 잘 수가 있습니다.
(어제도 일찍
성장 과정 기록을 위한 것은 전부 짧게 녹음을 10분 11분 정도 녹음을 한 것이라,
성장 과정 기록을 위한 녹음 수정, 녹음 문자 수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어제와 비슷, 어제보다 최저 기온은 오늘이 약간 낮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온도 제가 탄 천을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사이 미사 끝난 후에 성령께서 다스려 주실 때도 먼저 오른쪽 귀 안에 내이에 조직의 건조한 기관에 장액성 침을 보내어 주십니다. 건조한 기관에 침을 보내어 좀 활발하게 고막을 울리는 소리가 들기리게 다스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리 발바닥의 좌우가 온도가 다를 때 발목 운동을 하면, 에스상 결장과 직장 사이에 상처가 있는 수직 짧은 신경 상처에서 약간의 통증을 느낍니다.
귀의 청력을 회복시켜 주는 장액성 침을 하복부 직장과 에스상 결장에 많이 보내주어, 요새 청력도 좀 회복되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침 영광송과 영광송을 기도드리겠습니다.
그 두 기도를 연속하여 기도드리는 성과가 영광송만 기도드리는 것보다 훨씬 큰 느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몸을 90도로 굽히어 머리를 깊숙이 숙여 하느님께 큰 경배를 드립니다.
눈에 눈물이 약간 맺힙니다. 일어서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찬미합니다. 하느님, 하느님 뜻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 찬양합니다. 아멘
이어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 와 항상 영원히. 아멘.
몸을 90도로 굽히어 머리를 깊숙이 숙여 하느님께 큰 경배를 드립니다.
일어서서 성령님 눈물 감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기도가 끝나면 자연적 생명의 일용할 양식인 음식을 주시고 하느님의 뜻이 점점 완벽한 활동적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활기차고 활력이 넘치는 왕성한 활동을 하여
저의 상처가 있는 두뇌의 신경계가 활발하게 움직여 말초신경 상처를 치유하여 주시는 통증도 느끼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뜻은 인간이 하느님 뜻의 다스림을 받으려 하지 않아 봉사하는 하느님 뜻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뜻의 무한성의 활동적 생명과 하느님 뜻의 다양한 작품들의 활동적 생명과 바다에서는 하느님 뜻의 능력과 정의 활동적 생명을 주십니다.
이 땅 위에 계신 하느님의 뜻이 제 안에 머물러 주시어 해의 빛과 열로 먹을 수 있는 생물을 성장하게 하여,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그 생물을 성장하게 하여 오늘 아침에도 선택하여 음식을 먹습니다.
이 못난 작은 이는 하느님 뜻 안에서 생활하고 있으므로 활동적 생명을 점점 완벽하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음식을 감사히 먹겠습니다. 활동적 생명을 점점 더 완벽하게 주신다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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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책 제20권 31장 1926년 11월 29일, 저의 해석◆
저의 블로그 2015. 03.15.일자 제목 : 식사 전 기도와 식사 후기도 15.3.15.부터
의 끝 부분에 있는 천상의 책 제20권 31장 1926년 11월 29일, 저의 해석이 미흡(未洽)하여 그 해석 글을 수정하고 첨가하여 아래에 새로운 해석을 하여 글을 올립니다.
2015. 5. 16.(토) 오전 10시 분당(盆唐) 성 마태오 성당 미사에 참례하여 미사 후에 감실에 계신 성체예수님에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 달 이상 동안 이글 아래에 있는, 식사 전 기도와 식사 후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계속 반복하여 드리면 창조주 성부하느님께서 조용히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잘못되거나 좀 표현이 부족한 내용은 심장 박동의 강약으로, 머리를 아프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시어 고쳐주십니다.
기도를 드리면서 그 기도내용을 점점 더 깊이 생각하며 드리게 되므로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 식사 후 기도 내용에 대한 저의 생각을 새로이 반영하여 천상의 책 제20권 31장 1926년 11월 29일 저의 해석을 새로 쓰는 것에 대하여 기도를 드리자 긍정적인 표시로 저의 기도의 창을 파란 색 구름이 퍼지는 모양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용기를 내어 재 작성 한 것입니다. 이 31장에서의 예수님 말씀은, 부자(父子)는 일체이시므로 성부하느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이 오랜 세기 동안 인간의 뜻을 섬기는 종살이를 한 것이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영원한 피앗의 자녀들인 하느님 뜻의 자녀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루이사 피카레타를 하느님 뜻의 자녀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도록 키우셨습니다.
이 31장의 해석은 추후에 또 수정을 하거나 첨가를 할 수도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루이사 피카레타를 선택하시어,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고한 하느님의 피앗’을 설명이 불가능한 것을, 말씀으로 반세기 이상동안 설명하여 주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인내와 항구함과 정성과 끈질김과 자신감과 확고한 의욕과 의지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책임감과 의무감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지극한 인간 사랑을 누구나 상상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창조주 성부하느님의 ‘지고한 피앗(Fiat)’은 창조행위이므로 치밀하고 복잡하고, 다른 창조내용과 연관(聯關)되는 경우가 많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설명하여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도표나 그림이 필요할 경우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으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못난 작은이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되풀이 하여 읽고 묵상한 것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하느님 뜻은 조물(태양, 하늘, 바다를 예로 들어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안에 활동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뜻은 모든 조물에게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져다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조물 안에 활동적 생명을 가지고 계신데, 생명을 주시는 이유를 상상해 보면
예를 들어 태양 안에 하느님 뜻의 활동적 생명, 인간들이 연구한 내용에 의하면 핵 융합(核融合)으로 빛과 열을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생명을 주시지 않는 다면, 피조물 인간에게 태양이 하느님 뜻의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없는 내용으로‘피앗’이 이미 이루어 졌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이 생명을 주시어야 합니다.
다른 면에서 상상하면 창조주 하느님의 지고한 ‘피앗’인, 생명창조 행위 내용은 이미 정해져있지만,
생명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생명행위는, 다스리는 프로그램에 의하여 실행하게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상정(想定)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상상을 하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생명에는 질병이 있지 않았으나, 인간이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어서 선과 악이 공존하게 되어 악이 질병을 유발(誘發)시키어 질병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하느님의 뜻으로 다스리게 하였다면 질병을 없애거나 예방하는 조치를 취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이 주시는 치유은사(治癒恩賜)를 받은 성직자들을 도구(道具)로 사용하여 인간의 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치유의 혜택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많이 생각하여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창조주 성부하느님의 존재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어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기를 원하면 즉시 응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확고하게 믿고 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청원기도를 하는 신자라면, 만약 성령께서 생명을 다스리시어 치유를 하려고 하시면 즉시 응할 것이며, 성령께서는 그 사람의 병을 치유은사(治癒恩賜)를 받은 성직자들을 도구(道具)로 사용하여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창조주 성부하느님을 확고하게 믿고, 지은 죄를 알아 깨달아 회개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고해성사를 하고) 보속을 하는 사람에게는 병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은 천상의 책을 읽어 전보다 창조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더 확고한 믿음이 제 안에 자리를 잡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주역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창조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이 생겨서 천주교신자가 되었고, 그 믿음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보시고 성령께서 저를 선택하시어 강림하여주셔서, 이처럼 천상의 책을 열심히 읽게 인도하시고, 계속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계신다는 믿음이 점점 더 확고해집니다.)
창조주 성부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들을 많이 받는 길이라는 것을 거듭 말하고 싶습니다.
“7.내 딸아, 내 지고한 의지가 모든 조물 안에 남아 다스리면서 그들 각자의 생명으로서 내 뜻 특유의 일을 해 온 까닭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내 뜻이 그 자신에게, 즉, 사람 안에서 생명과 통치권을 가질 내 뜻이 그 자신에게 봉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뜻이 사람을 위하여 모든 조물을 창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느님의 지고한 의지(動的인 行爲)가 모든 조물 안에 남아 다스리면서 그들 각자의 생명으로서 내 뜻 특유의 일을 해 온 것은, 하느님 뜻이 하느님 뜻 자신에게 즉, 사람 안에서 생명을 가지며, 그 생명을 통치할 권리를 가질 하느님 뜻이 하느님 자신에게 봉사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봉사’는 생명을 주시는 행위, 사람 안에 가진 하느님 뜻의 생명이 하느님 뜻의 ‘피앗’대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생명, 즉 조물 안에 있는 생명을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는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하느님의 의지는 모든 조물 안에 남아 있습니다. 하늘나라 거처(居處)에 계신 하느님이 있고, 조물 안에 남아 있는 하느님도 있습니다. 분신(分身)으로 두 분이 각각 존재하십니다. 모든 조물 안에 하느님이 남아 계시니 인간의 능력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수(數)의 하느님이 조물 안에 남아서, 조물 안에 가지고 계신 활동적 생명(이것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다스리십니다. 즉 활동적 생명에게 하느님 뜻의 생명을 주고 계십니다.
조물, 피조물 등 모든 만물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피앗’으로 창조하신 생명을 모든 만물에게 주어 그 생명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피앗’은 하느님만이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치밀하고 복잡하고 완벽한 최고의 참된 선(善)의 내용이므로,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모든 만물에게 유익하므로 그렇게 ‘피앗’을 만드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피조물 사람에게는 조물처럼 활동적 생명을 만들어 주시지 않고, 조물 안에서 생명 활동을 하여 만들어진 것, 효과와 속성들을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시고, 더하여 하느님의 신적생명을 주시어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70억 인구인 사람 각자 안에서, 하느님의 뜻은 주신 생명과 통치권(다스리시는 권리)을 가질 하느님 뜻 자신(분신-分身-)에게 봉사를 하게 되어있는 것으로 ‘피앗’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조물 안의 활동적 생명에게 하느님 뜻의 생명을 주는 (‘피앗’내용대로의) 행위는 , 예를 들면 조물인 태양의 빛과 열로 만들어낸 효과와 속성들을 하느님 뜻의 생명활동으로 그들을 피조물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것으로 ‘피앗’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 효과(식물의 열매, 잎, 줄기, 뿌리 등과 동물)와 속성들(다양한 영양소들)을 질서와 조화와 균형으로 섭취하는 방법도, 하느님의 뜻이 인간들을 다스리시어 알려주시게 되어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조물 인간들아 자기 뜻을 행하려고 하느님의 뜻에서 물러갔습니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맨 앞자리에 놓아 존중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물러간 인간들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 ‘피앗’이 하느님 뜻대로 작동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질병에 시달리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뜻은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기위하여 만물 안에서 생명을 주는 활동을 계속하셔야 하시므로 하느님이 인간의 뜻을 섬기는 종살이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래 16절에서 루이사께서 말씀하십니다. ‘각각의 조물마다 그 고결하신 여왕이, 곧 지고하신 뜻이 베일로 가려진 채, 모든 인간의 종노릇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예를 들면, 조물인 태양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인간의 종노릇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태양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체적 생명 형성에 도움을 주고 있는 내용으로 ‘피앗’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데,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서 물러감에 따라, 인간의 뜻을 어쩔 수 없이 섬기는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 12절에서, 예수님께서 ‘실상 내 뜻은 창조된 만물 안에서 종들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인간의 뜻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내 뜻의 다스림을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들을 섬기는 것, 그것도 오랜 세기에 걸쳐 그렇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
인간은 위계(位階)로 보면 하느님의 종이라고 볼 수 있는데, 피조물 인간이 조물을 인간의 뜻으로 다스리려고 하므로 조물들은 그 다스림을 거절을 못하고 따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창조된 만물인, 피조물과 조물들 안에서 종들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종들의 종노릇을 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아래 17절부터 20절에 있습니다.
“10. 내 뜻은 원래 사람들 안에 있는 그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12. ....내 뜻은 창조된 만물 안에서 종들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인간의 뜻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내 뜻의 다스림을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 뜻과 조물 안에 있는 생명과 피조물 인간 안에 생명 상호간의 연결고리를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조물이 먼저 창조되고 피조물이 마지막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피조물 인간이 하느님 뜻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자기 뜻을 행하려고 하느님 뜻에서 물러났습니다.
인간 때문에 그 연결고리에 이상(異狀)이 생겼지만, 하느님 뜻이 조물과 피조물을 포함한 만물 안에서 생명 활동을 계속하여야 하므로, 하느님 뜻이 만물 안에서 힘든 종살이를 하고 계십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피조물 인간 안에서 종노릇을 하는 것은 정녕 비통하고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19...........그러니 '영원한 피앗'이 겪고 있는 그리도 모질고 오랜 고통에 대하여 내가 이해한 것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영원한 피앗’ 창조주 하느님이 만드신 ‘영원한 피앗’이므로 수정할 수도 없고 수정해서도 안 되는 창조행위입니다.
답답하기만 할 뿐입니다.
23. 그런즉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느냐? 너에게 봉사하는 것은 내 의지의 행복이다. 왜냐하면 내 의지가 (네 안의) 내 의지에게 봉사하고, 그 자신의 생명을 형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그 자신에 대한 지식과 그 자신의 거룩함에 봉사하고, 그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데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24. 내 뜻은 또 네가 기도하는 동안에도 네 안에 임해 있으면서 너로 하여금 내 뜻 안을 날아다니게 하고, 내 뜻의 행위를 하게끔 하며, 내 뜻의 재산을 소유하게 하는 것으로 네게 봉사한다. 내 뜻의 그와 같은 봉사 방식에는 영광과 승리와 지배력이 있다. 내 뜻은 따라서 영혼이 이 뜻의 봉사를 모든 일 속에서 완전히 받고자 하지 않을 때만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해결 방법은
인간들을 루이사 피카레타님처럼,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드는 방법,‘지고한 피앗’의 내용이 천상의 책에 있습니다.
이 못난 작은이는 천상의 책을 읽으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계속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저도 이 은총의 목적지가 어디 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희망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