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금난새의 리더십
배창모 회장께서 제 소개를 하셨는데 이 소개는 지금까지 저에 관한 소개 중에서
가장 긴 소개였습니다.
지휘자는 청중에게 한 번 인사한 다음 뒤 돌아서는 것이 일인데 지금은 여러분 선
배님들과 눈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려니 떨립니다.
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이지만 여러분들은 모두 우리나라 경제계의 지휘자들이
십니다. 평소 존경하는 메세나 협회의 박영주 회장이 계시니까 거짓말도 못 하겠고
저는 오늘 음악계에서 제가 어떻게 지휘자로서 자리 매김을 해 왔는지 말씀을 드리
겠습니다.
저는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서 그런지 어려서 부터 어딘가 반항적인 면과 독특한 성
격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햄릿과 돈키호테 중에서는 돈키호테 쪽에 가깝다고 할까요?
부모님은 저보고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지만 거꾸로 저는 내가 남에게 좋은 친
구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1960 년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이 마음에 들었고 남이 나에게 어떻
게 해 주거나 인정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어떻게 해서 행복감
을 줄수 있는가를 생활의 신조로 삼아 왔습니다.
저는 '지휘'를 공부하려고 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지휘 과(科)' 가없어 예술고등학교
에 들어가 작곡 등 비슷한 공부를 했는데 악기의 경우는 그 악기를 사면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지휘의 경우는 한 두 악기가 아니라 오케스트라 전체를 사야하는데... 그
럴 수가 없으니 대안으로서 각 대학 음악 학생들을 모아 앙상불(ensemble)을 조직
하고 나는 거기서 지휘를 공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Seoul Young Ensemble 이고 장소를 물색 하던 중 광화문에 있
는 미 공보원의 USIS 를 찾아내 앙상불 연주 연습을 하면서 미국 작곡가의 음악도
연주할 계획이라는 소위 'WIN WIN '전략으로 미 공보원장을 설득하여 성공하였고,
나중에는 서울 뿐 아니라 광주 등 국내 지방 미국 공보원에도 순회 공연해 달라는
역 제안 까지 받게 되어 지휘의 기회를 서울 뿐 아니라 지방에까지 보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독학으로 지휘를 배워 일종의 '돌파리 지휘자'에 불과 하였는데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 1974년에 독일 베르린에 가서 정식으로 지휘 공부를 하게
되었고 평소 하고 싶던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4년 만에 '카라얀 국제 지휘자 콩
쿠르'에서 대상을 탈 수 있었습니다.
독일 베르린에서 저는 지휘라는 '나무'를 공부하러 가서, 청중이라는 '숲' 공부까지
하게 되었다는데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귀국 후에는 저는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에 독일 베르린 과 같은 청중이라는
숲을 키울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갖고 지휘자 생활을 해 오고 있습니다.
국내에 들어와 1980 년에 국립교향악단의 지휘를 맡고 KBS 교향악단으로 바뀐 뒤
12년 동안 지휘를 해오면서 제가 느낀 우리나라의 음악계는 온도차가 너무 심하다
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1985 년 5공 시절 청와대에서의 심포니 연주 때는 단원들이 밤늦게 까
지 열심히 연습을 하였지만 1 주일 뒤의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에서는 연습을 거의
안 하는 것을 보고 이런 애정 쏠림 현상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직자들이 순회 근무를 하는 것처럼 지휘자도 서울과 지방을 순회 근무하
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날 ,수원시에서 그만 둔 지휘자의 자
리를 맡아 달라는 제의가 들어와 평소 생각 해 왔던 바라 즉석에서 수락하였지만
그동안 소속 해 있던 KBS 에서 난색을 표해 사표를 내고 수원으로 간 것입니다.
수원 시민회관에서의 첫 연주는 단원 80 명과 청중 80명으로 시작하였는데 그나마
제2부에서는 제 1부의 피아노 독주자 가족 친지들 40명이 가버린 뒤라 40명만 자
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청중이라는 숲을 키워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던 저는 단원들에게 증권이나 부동산에
투자하기에 앞 서 나 '지휘자'에게 투자 해 달라는 주문을 하면서 다음 해 1월 초
시무식에서는 파격적으로 수원 시청 청사에서 음악회를 가졌는데 500 명의 직원들
로 구성된 청중들을 감동시키게 되었고 당시 수원 시장 (전영국씨)은 우리 단원들
에게 100 % 의 추가 보너스를 지급하여 단원들의 사기를 올려 주는 계기가 되었습
니다.
그래서 저는 단원들에게 수원이 갈비로 유명해지는 것보다 '우리 오케스트라가 수
원의 자랑이 되자'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습니다.
1992년경 ' 예술의 전당'의 청소년 음악회를 수락한 것도 그 동안 우리나라 음악회
는 초대권으로 가는 곳이란 저간의 인식을 불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청소년 음악회에서 초대권을 없애는 대신 2,000원이라는 싼 값을 내도록 하고 , '
금난새와 함께 하는 세계음악' 이란 음악회 명칭과 함께 현장감 있는' 해설'을 겯
들이니까 첫 연주회의 2,650 유료 좌석이 매진되었고 그 다음 해 9회의 청소년 음
악회도 매진되면서 그 후 6년간 전석 매진의 기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 청중들 박수 )
여러분이 전공인 마케팅을 음악회에서 처음 접목시킨 결과라 하겠는데 그래서 저는
그 후 국악이나 다른 음악회에서 해설을 하는 것을 보고 '해설 마켓팅'의 원조는 금
난새라는 것을 말 하곤 합니다.
1994년 '예술의 전당'에서 '제야 음악회' 를 처음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
습니다.
그 첫 번째 제야 음악회 는 한 달 전에 좌석이 매진되었었는데 앙콜을 받으면서 저
는 답례로 ' 전통이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는 유명
한 ( ? ) 말을 한 기억이 납니다.
1998 년 수원 오케스트라를 그만 두고 Euro-Asian Philharmonic Orchestra 를 만
들었는데 이것은 정부의 지원이 없는 순수 민간기업 (POSCO , CJ ) 의 스폰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1999년 12월 31일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의미 있는 날인데 이 날 10시
30분에 서양의 유리 성당과 분위기가 같은 POSCO 건물 '로비'에서 새천년을 위
한 음악회를 갖고 베토벤의 제 9 번 교향곡인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여 기립 박수를
받았는데 그 때 기립 박수를 받은 이유는 연주 장소가 일반 홀이 아닌 '로비'라는
점과 '새로운 천년'을 맞는다는 기대감 ,그리고 '연주' 자체가 좋았기 때문이었습니
다.
( 청중들 박수 )
성공적인 첫 민간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베토벤의 9 개 교향곡을 시리즈로 연주하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POSCO 측에서 광양과 포항에서 각각 2번을 하자고 추가 제안
하여 베토벤 곡은 도합 13회의 연주로 늘어났습니다.
베토벤 다음 차이코프스키와 브람스 등을 연주하는 등 첫 해에 45회의 연주를 하
고 3년만에 100 회를 넘고 재작년 2006년부터는 1년에 120 회의 연주를 할 수 있
는 오케스트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부로부터 연간 막대한 지원을 받는 시향 ( 130억원 ), KBS (100억원 )
등이 연간 100회를 안 넘는다는 사실에 비교 해 볼 때 순수 민간 오케스트라 가
정부의 지원 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보하여 우리의 자산으로 남게 되었
다는데 큰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은 여러분과 같은 좋은 청중과 열심히 연주하는 우리 오케스트라 단
원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저는 항상 단원들이 얼마를 받느냐보다 얼마나 좋은 연주를
할 의욕을 갖느냐에 신경을 모으고 있고 이러한 단원들의 동기 유발을 위하여 요즘
은 연주가 끝나면 지휘자가 먼저 퇴장하는 관행을 깨고 단원들이 박수를 충분히 받
은 다음 퇴장하는 금난새 식 퇴장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청중 들 박수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17회 동문 포럼에서, 지휘자 금난새씨가 강의한 내용을 17회 심명기 동문이 요약한 것을 이곳에 옮긴 것이다.
위키백과
금난새(1947년 9월 25일 - )는 대한민국의 지휘자이다.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예술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영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데뷰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작곡과 지휘를 배웠으며, 졸업 후 독일로 유학해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라벤슈타인에게 지휘를 배웠다.
1976년에는 프랑스에서 피에르 데르보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베를린에서 개최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쿨에 출전해 4위로 입상했다. 귀국 후 KBS 교향악단 전임 지휘자로 활동했고, 1986년에는 볼프강 자발리슈의 초청으로 뮌헨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지휘 연수를 받기도 했다.
1988년에는 유럽 각지의 관현악단 수석 주자들로 구성된 유러피언 마스터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올림픽 문화예술축전 순회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KBS 교향악단을 지휘해 제작한 두 장의 앨범을 서울음반에서 발매해 화제가 되었으며,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교향악단과 녹음한 음반도 서울음반과 삼성 나이세스를 통해 발매되었다.
KBS 교향악단 외에 수원 시립 교향악단과 대전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기도 했으나, 수원 시립 교향악단과는 임기 말기에 악단과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불명예 퇴진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1998년에 수원 시립 교향악단에서 사임한 단원들을 중심으로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가 되었으며, 포스코와 CJ그룹의 후원을 받아 다양한 형태의 기획 연주회를 개최해 화제가 되고 있다.
2006년에는 경기도립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으며,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친근한 해설과 참신한 기획 등으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다.
1995년에 옥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99년 음악 평론가 협회에서 음악대상을 수상했다. 유라시안 필과 녹음한 비발디의 '사계' 와 다양한 클래식 작품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세트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등의 음반이 시판되고 있다. 지휘자 금노상의 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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