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토정 이지함은 탁월한 경제 사상가 [중앙일보]
“‘이름을 딴‘토정비결’ 저자는 다른 사람”
신병주 지음, 글항아리, 296쪽, 1만3500원
토정 이지함(1517~1578). ‘토정(土亭)’은 이지함이 마포 강변에 흙으로 쌓은 정자다. 지금의 마포구 ‘토정로’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 나루터의 정자 ‘토정’에서 유유히 배를 몰아 팔도를 유람하며 16세기 조선의 사상계를 종횡무진한 이단아가 이지함이다. 전통 명문가의 자제였으면서도 과거를 접고 처사로 은일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혹한 민생의 현실을 목도했다. 교조화되기 전의 조선 성리학에 숱한 상상력의 씨앗을 뿌렸던 인물이다. 그 상상력을 은유로서가 아니라 빈민 구휼과 국부 증대의 실천적 개혁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시대에 앞서 상공업 진흥과 해양자원 개발을 주장했다.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토정이 뿌린 사상적 씨앗이 200여 년 뒤 ‘북학 사상’으로 만개했다고 주장한다. 16세기의 탁월한 경제 사상가로서의 이지함을 재조명한 것이다. 기인적 풍모 때문에 소설적으로만 이해돼 온 이지함에 대한 학술적 평전이다. “구리로 만든 솥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패랭이를 얹어서 밤낮으로 다녔다. 잠을 자고 싶으면 길가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잤다”는 식의 기행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지함은 16세기 조선 사상계의 본류 속에서 당당하게 교류한 학자다.
충남 아산시에 세워진 이지함 동상. [중앙포토] | |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제자 조헌에게 천민 출신의 송익필과 서기를 스승과 사우로 추천했던 인물이다.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능력과 실질을 숭상한 이가 토정이었다. 토정이 최고의 인재로 꼽은 인물이 물길 잘 알며 고기 잘 낚는 양심적 어부였으니, 그가 품은 개방적 사유의 폭은 지금 시대에도 가늠하기 힘든 여운을 남긴다.
책은 『토정비결』의 저자가 이지함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그의 사후 100년 뒤 후손이 펴낸 『토정유고』에는 『토정비결』이 포함돼 있지 않다. 19세기에 유행한 『토정비결』의 저자로 이지함의 이름이 빌려졌던 것은 그의 인기에 대한 민중적 헌사였을 거란 이야기다. 책은 조선의 사상사·법제, 풍속에 대한 해설까지 곁들여 쉽고 넓게 읽힌다. 하지만 ‘학술 평전’으로서 토정 사상의 한계나 시대적 제약점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없는 점이 아쉽다.
배노필 기자
이지함 평전 - 은둔과 변혁의 변증법적 실천가 / 저자 신병주 | 출판사 글항아리
북학 사상의 원조 이지함!
「토종비결」의 저자로만 알려진 그를 재조명한다!
16세기 중, 후반의 조선은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의 여파로 정치와 사상적인 후유증이 컸던 시기다. 사림파의 집권으로 지방 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자성리학이 정착된 때로 간주하여 왔다. 하지만 요즘 이 시기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16세기 사상계를 주도한 대표적인 학파로는 남명학파와 화담학파가 있다. 그러나 남명 학파의 조식과 그 학파에 대해서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반면, 화담학파의 적자이자 사상가인 이지함에 대해서는 그 연구가 부진했다. 이 책은 <토정비결>의 저자로만 알려진 이지함에 대해 본격적으로 재조명한 평전이다.
<토정비결>이라는 베일에 가려진 이지함의 실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율곡마저 감탄시킨 그의 뛰어난 학자적 자질과 16세기 조선 현실을 변혁시키고자 한 개혁가로서의 열정과 업적을 함께 조명한다. 더불어 그와 교유를 맺었던 지식인들도 이 평전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16세기 조선이 성리학의 이념을 심화시켜가면서도 사회라는 정치적 충격에 대해 지식인들이 사상적으로 대응한 점을 포착해 나간다.
<출판사 서평>
다양성과 개방성이 꽃핀 시기로 16세기 조선 재발견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토정 이지함을 재조명한 평전
16세기 중·후반의 조선은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士禍의 여파로 정치·사상적인 후유증이 컸던 시기다. 그동안 이 시기는 사림파의 집권으로 지방 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자성리학이 정착된 때로 간주돼 성리학에만 집중해서 논의돼 왔다. 하지만 그러한 연구 경향은 당대의 개성적인 인물들을 주목하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최근 들어 16세기 이후의 사상계를 좀 더 폭넓고 다양하게 이해하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이 시기 사상계를 주도한 대표적 인물로는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을 들 수 있는데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조선중기 사상계에 큰 흐름을 형성했다. 남명 조식과 그 학파에 대해서는 경상대 남명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지난 몇 년간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그 반면에 화담학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서경덕 이외에는 그 연구가 부진했다.
그 이유로는 화담학파의 핵심 인물인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왜 그럴까?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그 대중적 인지도는 누구보다 높은 이지함인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신병주 건국대 교수(한국사)가 지난 10여 년간 천착해온 결과물로 내놓은 『이지함 평전』은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하고 반가운 선물이다. 저자는 이지함 사후에 편찬된 『토정유고』와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등을 기본 사료로 삼고 여기에 『대동야승』 『택당집』 『남명집』 『화담집』 『동유상우록』 『지봉유설』 『북학의』 『어우야담』 『해동이적』 『대동기문』 『동패락송』 등의 자료들을 더해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 이지함의 삶의 파편들을 모아나갔다.
저자가 이지함 평전을 집필한 의도는 크게 두 가지다. 남명 조식과 마찬가지로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아 그동안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이지함의 삶과 사상을 제대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상업이나 수공업 해양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국제무역까지 주장한 그의 혁신적인 사회경제 사상은 조선후기 북학사상의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p.13)고 저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둘째, 이지함을 통해서 조선의 16세기 사상계의 성격을 재인식하고자 한다. 16세기는 주자성리학이 정착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학계가 성리학 일변도로 완전히 경색되기 이전, 그러니까 양명학이나 도교와 같은 사상전통이 널리 읽히면서 다양성과 개방성을 추구한 시대였다. 저자는 16세기를 그 이후에 펼쳐진 실학사상의 전개와 맞물리는 역사적 톱니바퀴의 일부로 명확하게 규명해낸다. 저자는 당시 조선사회는 기존에 인식된 것보다 훨씬 다양한 학문과 사상이 공존했던 시대이며, 그 대표주자로 이지함을 내세웠다. 특히 國富의 증대와 민생에 유용한 것이라면 어떤 산업도 개발해야 한다는 신념과 유통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근대 경제학자들의 논리와도 유사성을 갖는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보다 앞선 시기에 적극적인 국부 증진책을 제시하고 실천한 선구적인 인물인 이지함을,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나아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경제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칭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토정비결」은 왜 이지함의 저술일 수 없는가?
민중 지향적인 학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아야
이 평전에서 저자는 점술과 복서에 능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지는 특이한 인물로서 “기인 이지함”을 “16세기 조선 사상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완전히 재인식한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논란이 많은 『토정비결』 저자 문제를 확실하게 짚고 있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이 비결서가 이지함의 저작일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결론짓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에 유행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 등을 고려해볼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假託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고 말한다. 먼저 이지함 사후 100여 년 후인 숙종 때 그의 고손자 이정익이 토정의 유고를 모아 간행한 책이 『토정유고』이다. 당시에 『토종비결』이 유행했다면 반드시 이 유고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또한 정조 때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유득공柳得恭이 서울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책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만약 『토정비결』이 조선후기에도 유행했다면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에 결코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토정비결』이 담아내고 있는 뜻을 보면 이지함의 사상과 통하는 측면이 많아 단순히 그 관계를 부정할 수만은 없다.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여 상수학象數學의 사고를 많이 드러내는데, 이지함이 스승 서경덕에게서 상수학과 『주역』을 배웠던 점 등을 고려하면, 『주역』 사상에 내포된 변혁 의지가 『토정비결』에도 반영되어 변화를 갈망하는 백성들의 의식에 깊이 각인을 새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정비결』이 기본적으로 『주역』을 모태로 한 저술이라는 점은 이덕형이 이지함을 염두에 두고 “세상에서 풍수를 숭상하고 믿게 된 것은 이씨의 집안에서 시작된 것이다”고 말한 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민간에서 유포되던 비결秘訣이 그의 이름을 따서 정착한 것은 그가 그만큼 민중 지향적인 학자였음을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실학의 기원은 16세기로 당겨져야 한다
조선 후기 사회개혁론의 海上 기반 밝혀
이지함의 사상은 무엇보다 민간의 실상을 직접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구축됐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유랑생활에 생애 대부분을 쏟은 그는, 백성들의 생활고를 직접 보고 겪고 들을 수 있었다. 이지함은 민생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쳤으며 자급자족의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주민들이 가난에 허덕이자 자기 소유물을 고르게 분배해주기도 했고,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 수만 개를 수확해 바가지를 만들어 곡물 수천 석과 교환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했다.
『토정유고』의 「유사」나 『연려실기술』 등에 나오는 이런 기록은 아주 단편적인 것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이지함의 행위는 적극적인 계획과 실천, 나아가 백성들의 광범위한 지지 없이는 이루기 힘든 일이다. 특히 한산 이씨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피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서 직접 수공업이나 상업, 수산업에 종사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지함의 이러한 학풍은 이수광을 비롯한 당대의 일부의 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나며, 김신국, 유몽인, 이산해 등 북인계 관료학자들은 이지함이 제시한 사회경제 사상과 유사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후대의 북학파 학자들에게서 그 이념과 합치되는 부분이 많이 나타나며, 박제가는 16세기에 이미 해외 통상론까지 주장한 이지함의 탁견에 탄복했다고 한다.
이지함의 학풍과 사상의 특징은 개방성과 다양성에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불교나 노장 사상에 경도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개방성은 전통적인 농업 중심의 사상에만 집착하지 않고 상공업·어업·염업의 중시 등 유교적 말업관末業觀을 역전시키는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국부의 증대와 민생 안정을 위해서라면 의義와 리利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원 개발을 도모한 이지함의 사회경제 사상은 매우 진보적이고 유용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민중들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그 애로 사항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깊다. 이지함의 사상은 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당시의 사회 문제 해결의 방책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말았지만, 상공업과 유통경제의 바탕 위에서 국부의 증대를 꾀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주목되면서 농업 중심의 사회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이지함의 행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불가분하게 관계있는 용어는 ‘해상海上’이다. 그가 거처했던 마포의 토정은 서해와 통해 팔도의 배가 모이는 곳이었으며, 특히 이지함은 배를 타는 데 익숙해 해상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가 상업과 유통경제를 중시한 것도 해상을 주된 생활권으로 한 그의 지역적 기반과 연관이 있다. 그 스스로 자신을 ‘해상에 사는 광민狂珉’으로 표현했으며, 제자인 조헌은 ‘해우海隅’에 은거한 이지함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고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 장지가 해안 가까이 있어 조수가 밀려옴을 걱정해 옮겼다는 기록, 성품이 배타기를 좋아하고 항해 중에 조수의 흐름을 알아 위험을 만나지 않았다는 기록 등이 전한다. 특히 어염漁鹽 등 해상 경제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는 정책을 제시한 것과 상소문을 통해 ‘전라도 만경현에 있는 섬 양초를 포천에 소속시켜 이곳에서 고기를 잡아 곡식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하는 등 섬의 경제적 가치를 주목한 것은 섬 지역을 답사한 경험이 큰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지함 등 조선시대 학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장소로 섬에 관심을 둔 것은 『홍길동전』의 율도국 건설이나, 『허생전』의 삼봉도 등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시대 학자들이 이러한 인식은 앞으로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부분이다. 조선중기 처사형 삶을 살아간 대표적인 학자이자 이지함과 교분을 유지한 조식과 서경덕의 행적에서도 해안적 기반이 발견된다. 조식은 30세부터 17년간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생활했다. 조헌의 상소문에서도 조식이 ‘해우海隅’에 은거했음을 표현하고 있다.
서경덕의 거처인 개성 또한 임진강을 통해 서해안과 통교가 쉬운 지역이며, 특히 서경덕의 문인 중에는 해안지역을 근거지로 한 다양한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들이 주축이 된 북인의 학문과 사상에 농촌 중심의 경제 질서에만 집착하지 않고 상업이나 유통경제에 관심을 두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은둔 처사이면서도 폭넓은 교유관계 밝혀
조선 중기 사상계에 남겨진 과제 제시
이지함의 학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스승인 서경덕의 학풍과 현실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경덕은 개성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개성 특유의 정서와 학풍을 대변하는 학자로 자리매김했다. 개성은 고려 왕조의 수도로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치적으로는 탄압을 받았지만, 학문적 전통과 기반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학문적 분위기는 개방적인 지역 정서와 맞물려 성리학 이외에 도가 등 다양한 사상이 유행했다. 구왕조의 수도로 학문과 문화의 진수를 계승했다는 점, 서울과 근접한 지역으로서 일찍부터 교통과 상업이 발달하고 중국 사신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기에 학문적 정보 교환이 용이한 지역이었다는 점 등은 개성이 학문적 성지로 발달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서경덕과 같은 대학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개성 특유의 자유스럽고 개방적인 정서, 특히 상업이 일찍 발달한 도시라는 점을 고려하면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이지함에게서 적극적인 상업 중시 사상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지함은 서경덕을 매개로 남명 조식과도 인연을 맺었다. 이지함은 남쪽 지방을 유람할 때 은거 중이던 조식을 찾았으며, 조식은 멀리서 온 이지함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네의 풍골을 어찌 모르겠는가?’라고 했을 만큼 두 사람은 서로 존숭하는 사이였다. 둘은 모두 성리학의 실천적인 측면에 중심을 두었고, 외척정치에서 파생하는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성리학 이외의 다양한 사상에 대한 관심, 학문에서의 실천성 강조, 상소문을 통한 개혁 의지 제시 등에서 둘은 매우 닮아 있다. 국방과 무예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 해안적인 기반이 두드러지는 점도 이지함과 조식의 공통점이다.
이 책에서는 율곡 이이와 이지함의 인연도 비중있게 다뤄진다. 이이는 이지함에 대해 ‘기화이초奇花異草’라고 편하게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의 『석담일기』에는 이지함의 행적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오늘날 숙헌(이이의 자)이 조정에 머물러 있으면 크게 일을 하지는 못할망정 필시 위태로워 망하는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지함이 이이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그가 이이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분명히 한계를 지적하고 거리를 두는 그의 객관적인 태도를 드러내주고 있다. 저자는 이이가 이지함에 대해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하며 그것은 ‘영원한 모범생’과 ‘영원한 방랑자’ 사이의 넓은 틈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지함은 서경덕·조식·이이 외에도 여러 학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 인물들은 정파政派로는 크게 북인계와 서인계 학자로 나뉠 수 있다. 『토정유고』의 서문은 이지함의 교유관계에 대해 박순·고경명·이이·성혼·윤두수·정철 등 서인계 인물과의 교유가 주축이었던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서문의 찬자인 정호鄭澔(1648~1736)의 당색이 서인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이지함이 그 성격과 기질상 북인 학자들과 더 가까웠지만, 그가 서인들과 어울린 것은 충청도와 서울을 생활권으로 하는 지역적인 기반을 공유했기 때문이며, 서인과 북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귀었던 것은 그만큼 이지함이 개방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북인이 주축이 되어 쓰여진 『선조실록』에는 이지함의 졸기가 없는 반면, 서인이 다시 고쳐 쓴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지함의 졸기가 자세히 나와 있어 서인 내에서 이지함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드러내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항복과 한준겸이 사마시 초시에 합격한 뒤에 마포에 있는 이지함을 찾아와 아침저녁으로 이야기를 들었다는 점이다. 반면 실록의 엇갈린 기록은 이지함이 북인과 친했지만 그 정치적 실세들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이지함은 후생을 가르치기를 좋아했다. 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헌趙憲(1544~1592), 천민 출신의 제자 서기, 제자는 아니지만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송익필 등이 이지함에게 배웠거나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서기와 송익필은 모두 천민 출신으로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인데, 이지함은 일찍이 이들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 능력을 이끌어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지함이 천민 출신의 뛰어난 인재들에 대해 유달리 애착을 가졌던 것은 앞서 이항복과 한준겸이 이지함을 찾아가 일사逸士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충청도와 전라도 해상에서 어업에 종사한 어부와 은둔하여 스스로 즐기면서 나이 60이 넘어 자신에게 배울 것을 청한 서치무徐致武라는 인물 등 2명을 들었다는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이지함은 보통의 백성들도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무식함을 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누구보다 확고히 가지고 있었고 이를 평생토록 줄기차게 추진했다. 이 평전을 통해 우리는 이지함의 이러한 면모를 손에 잡힐 듯이 보고 느낄 수 있다.
이지함의 독자적인 학풍 형성과정 밝혀
「장자」 등 도가적 유산이 미친 영향 고증
친구 안명세가 권력에 저항하다 옥사한 후 이지함은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를 결심했다. 출사하는 것이 곧 이름을 더럽히는 시대였기에 이는 진보적인 선택이었다. 사화의 여파로 은거의 삶을 선택한 처사형 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만큼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조선시대 도가에 가장 심취했던 학자 정렴이 천문·지리·의약 등에 해박했던 것이나, 벼슬을 싫어한 구영안이 음양·의술·선도·불도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던 모습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지함에 대한 기록을 볼 때도 이는 두드러져, 그는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산수·지음 류에 통달하여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나온다. 특히 이지함이 한서와 기한을 잘 참고 혹은 10일 간이나 음식을 끊어도 병이 나지 않았다는 기록, 질병이 생기고 치료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일부러 신체의 일부분을 찬 기운에 노출시켜 풍이 들게 했다가 두세 달 면벽수도하여 겨우 고쳤다는 『석담일기』의 기록은 그가 도가의 양생법에 정통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지함의 사상적 기반은 명백하게 유교였다. 이지함의 학풍 형성에 영향을 준 사상적 요소로는 우선 ‘경敬’ 사상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경을 위주로 하여 이치를 연구하고 실천력을 길러 독실히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모두 경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형 이지번이 계속 과거시험에서 낙방하자 그도 시험에 나아가지 않다가 형이 합격하고 나서야 과거시험장에 나아가 답안지에 이름을 쓰지 않고 냈다는 일화는 그가 유교적 덕목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주일무적, 정제엄숙, 상성성, 심신수렴 등으로 표현되는 경 사상은 내면 수양을 중시하는 개념으로 16세기 사림파를 대표하는 조광조, 이황, 조식 등에게 널리 수용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지치주의至治主義 운동을 전개한 기묘사림의 단계에서 사회 현실과 관련된 위기지학을 위한 방법으로 해석되었고, 이는 이지함 등 중·명종대에 주로 활약한 사림들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경 이념을 중시한 이지함의 사상은 16세기 사림파의 기본적인 사상과 그 토대가 거의 같았으며, 이것은 그가 기인이 아닌 16세기 사상사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학자임을 입증하는 지표라고 강조한다.
이지함은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사상에 경도돼 있었는데, 특히 도가 사상에 심취했다. 이지함은 그의 논설인 「대인설大人說」에서 ‘귀한 것은 관작을 얻지 않는 것보다 귀함이 없고, 부유함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함이 없다’는 논리를 제시했는데, 이는 노자나 장자에 나오는 역설과 반어법을 주로 사용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이지함을 기화이초로 평가한 이이가 그에게 『장자』와 맞먹을 만한 책을 써보라고 권유한 점도 이지함이 노장서에 경도된 면이 있었음을 입증해준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경도가 이지함이 현실세계를 떠난 학자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지함과 그의 주변인물들은 비판자적인 위치에서 자유롭게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으며, 문인들의 양성을 통해 광범하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조선의 조정에서도 이들의 학문적 능력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즉, 이 시기 도가의식 내지는 도가적인 삶은 폐쇄적인 현실도피의 삶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치열한 현실 인식의 한 수단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 외에 저자는 『해동전도록』『해동이적』 등 도가류 서적과 이지함이 관련된 부분을 추적하면서 조선의 도가적 학맥 속에서 차지하는 이지함의 위상을 짚는가 하면, 『주역』에 심취한 스승 서경덕의 학풍을 이어받아 『주역』과 이지함이 맺는 관련을 짚어본다. 특히 정치와 사상에서 불변의 ‘리理’를 추구하면서 조선사회를 보수적이고 안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주역』 공부를 바탕으로 ‘기氣’의 변화와 운동성을 중시함으로써 혁신과 제도개혁으로 나아간 이지함의 면모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자료의 한계 속에서도 이지함의 모든 것 밝혀내
학계에 던져주는 16세기 사상사 연구의 과제
신병주 교수는 많은 한계 속에서 이지함에 관한 실록과 그 외 자료들을 모두 수집하면서, 그의 인물됨을 추적하고 평가하기 위해 조금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즉 이지함을 둘러싼 조선중기 인물들을 각 편의 주요 인물로 내세우면서 그들과 이지함과의 사상 및 교유관계를 추적해감으로써 이지함의 실체를 좀더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즉 이지함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주인공이 되고 있다. 특히 이 평전은 16세기 조선의 사화라는 정치적 충격에서 지식인들이 어떻게 사상적으로 대응해나갔는가를 포착하면서, 이지함을 그 중심에 내세우고 있다.
이렇듯 퍼즐을 맞추어나가는 방식으로 서술되는 이 책은 서서히 이지함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상업이나 수공업 해양자원의 적극적인 개발, 국제무역까지 주장한 그의 혁신적인 사회경제 사상은 조선후기 북학사상의 원류가 된다는 점은 16세기 사상계를 좀더 폭넓게 평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16세기는 사화의 시대였다. 학자층이 넓지 않았던 이 시대, 사화의 끔찍함으로 인해 지식인 그룹인 사림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이 지방으로 낙향하게 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성수침·성운·이황·임백령·서경덕·김인후·조식·이항·정지운·성제원·이지함 등). 그렇기 때문에 또한 16세기는 처사處士의 시대였다. 사회라는 부정적인 정치 환경 속에서 관직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모순을 지적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이자 선비의 길임을 인식한 지식인들의 시대로 16세기를 재인식하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적 안목을 열어준다.
특히 조선중기는 그동안 이기일원론, 사단칠정론 등을 통해 이론 논쟁의 시대로만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시기 조식이나 이지함 같은 이들은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가져 이를 기반으로 민생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도 당시가 ‘처사’의 시대였기 때문인데, 저자는 산림에 은거한 유일遺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함으로써 인재를 보충하려 했던 당시 조선 조정의 적극적인 정책을 재평가하기도 한다.
당시의 사회에서 민중의 경제적 고민을 해결하고 항상 위안의 기둥이 되어준 이지함의 학풍과 사상을 통하여,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16세기의 조선사회가 결코 보수적이기만 한 사회는 아니었으며, 다양한 학문적 모색과 사상적 고민이 제기되면서 민생의 안정과 사회 발전을 도모하는 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제기되고 있었던 시대라는 점이다. 요즈음에도 정치권 일각에서는 일반 서민의 실생활은 저버린 채 자기 정당의 이속 챙기기와 명분 쌓기가 한창이다. 이지함이 제기했던 민중 본위의 사회사상과 적극적인 국부國富 증대책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어려운 시절 백성의 삶 속에 직접 뛰어들어가 체험을 통해 민생 안정과 국부 증진을 꾀한 그의 사상은 시차를 뛰어넘은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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