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
유리미술가 심현지
유리미술가 심현지(56)를 아는 이가 “그를 만나면 손을 유심히 보라”고 신신당부했다. 한번만 봐도 뇌리에 콱 박힐 거라고 자신있어 했다. 지금 까지 자기가 본 손 가운데 제일 매력적인 손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렇 게 했더니 정말 그랬다. 작고 여린 팔목에 비해 크고 넓은 손바닥, 대꼬 챙이처럼 딱딱하고 쭉쭉 뻗은 손가락, 거기 중간에 깊게 옹이지고 뭉툭한 마디들, 그리고 길게 타원을 그리는 건강한 손톱. 유리처럼 날카롭고 단 단한 손이었다. 그의 집에는 유리가
많다. 삼청동 고개에 자리잡은 낡은 한옥은 짓다만 유리성같다. 반도체칩 만한 유리조각들이 융단처럼 깔려 있고, 창문마다 색유리가 끼워져 있다. 발깔개도 액자도 꽃병도 유리다. 그래서 하루종일 집 전체가 성당의 스테 인드글라스처럼 반짝인다. 해가 뜨면 햇빛으로, 해가 지면 전등빛으로 오 묘한 색깔을 뿌려댄다. 1초 단위로 달라지는 그 다채로운 빛의 프리즘을 그도 헤아리기 어렵단다. “비오는 날 창문을 두드리는 회색빛, 여름날 아스팔트를 달구는 황금빛, 가을날 골목길에 떨어지는 단풍빛, 눈내리는 날 외투에 얹히는 하얀빛….” 한참이나 시구절 같은 말을 읊조린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손
유리와는 거리가 먼 삶이 꽤 길었다. 학창시절엔 농과대를 다니며 4년 내 내 농땡이를 쳤다. 도서관이나 강의실보다는 음악감상실에서 시간을 주로 보냈다. 졸업시험이 있던 때라 시골 부모들이 “딸년 졸업이나 제때 하겠 느냐고 가슴을 졸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학교에서 10 명도 안 떨어지는데 내가 왜 떨어지느냐”며 큰소리를 쳤단다. 졸업하고 외국항공사에서 일하다 결혼해 애까지 낳고서도 부모 눈에는 항상 철부지 딸이었나 보다. “결혼한 뒤에도 부모님한테서 일일이 애프터서비스를 받 았다”며 웃는다.
우여곡절이 많은 프랑스 유학이었다. 남편이 국비유학생으로 프랑스에 머 물던 터라 유학을 추진했지만 좀체 길이 열리지 않았다. 60년대 중반이었 는데 여권을 신청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부부가 함께 외국에 나가는 걸 수상히 여기던 시절이었다. 백방으로 손을 써 파리를 거치는 미국행 비행 기를 탔다. 파리에서 남편을 만나더라도 함께 살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썼 다. 훗날 한국에 두고온 딸을 데려오려고 하니 그게 말썽을 일으켰다. “ 왜 각서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화가 치밀어 파리주재 한국대사 관에 격문 비슷한 편지를 보냈다. “고아는 몇천명씩 내보내면서 부모있 는 딸은 왜 묶어두느냐”고. 그랬더니 몇달 뒤 파리에서 딸을 만날 수 있 었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생각처럼 만만치 않았다. 남편 뒷바라지하랴 아르바 이트하랴 공부는 손도 댈 수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인들의 한국에 대한 무지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한국을 미국의 속국이나 식민지로 여 겼다. 포르투갈이나 터키에서 온 유학생들보다도 대접이 박했다. “너희 나라도 언어가 있느냐. 영어를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수시로 받았다.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보니 불끈 오기가 났다. 한국인의 매운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도 그들이 자랑하는 미술로. 힘든 시절은 스위스로 이어졌다. 남편 장학금은 떨어지고 생활비는 쪼들 리는데 뱃속에서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일자리가 있다는 친구의 연락 을 받고 알프스를 넘었다. 레만호 근처 번화가에서 잡화점 점원으로 일하 면서 건축미술을 공부했다. 공부하랴 아르바이트하랴 애 키우랴 잠 잘 수 있는 시간이 서너시간에 불과했다. 몸이 배겨나질 못하고 말라갔다. 마침 유럽에 다이어트열풍이 불던 때였는데 현지 신문기자들이 다이어트의 비 결을 물어올 정도였다. 학교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유리 미술을 배웠다. 건축보다는 손으로 하는 공예쪽에 마음이 끌렸다. 유리를 만나기까지 멀고 먼 우회로를 돌았던 셈이다.
(사진/손톱만한 크기의 유리조각 안에도 수천개의 반사점이 숨어 있다. 그 유리를 자르고 붙이다보면 손을 베는 일은 다반사다. )
처음엔 학교나 성당을 보수하는 게 일이었다. 프랑스에서 동양인 유리미 술가가 작가로서 독립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창작욕을 접어두고 보수 작업에 매달렸다. 나무조각하는 사람이 목수일 못하랴는 심정으로 자위했 다. 다행히 파리에는 문화재가 많아 일거리는 충분했다. 오히려 문제는 체력이었다. 보수작업은 청소하는 것부터가 큰일이었다. 수백년 묵은 때 를 며칠 밤을 새워 닦아내고 나면 남은 일이 까마득했다. 남편도 아이들 도 돌볼 틈이 없었다. 지금 돌이키면 아이들을 거저 키운 것같아 죄스러 울 때가 많다.
중노동 유리미술… 이사하는 데만 트럭 서너대
행운도 있었다. 지금의 아틀리에를 장만하기 전, 파리에서 예술가들에게 싸게 임대해준 낡은 설탕공장 자리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쌍둥이 건물 이었는데 한채가 불타자 나머지 한채도 철거위기에 몰렸다. 2년을 버티며 파리시와 실랑이를 벌였다. 우습게도 시청에 찾아가 항의할 때마다 보상 금이 늘었다. 작업장을 불시에 빼앗긴 작가가 겪어야 하는 창작상의 장애 에 대한 보상금이었다. 세차례쯤 찾아가 항의를 했는데 우리 돈으로 1억 원 가까운 돈이 생기더란다. 그걸로 아틀리에를 장만하고 만세를 불렀다.
유리미술은 중노동에 가깝다. 그가 다루는 유리는 입으로 불어서 만든다. 두께가 일정치 않아 빛이 럭비공처럼 난반사를 일으킨다. 손톱만한 크기 의 유리조각 안에도 수천개의 반사점이 숨어 있다. 그 유리를 자르고 붙 이다보면 손을 베는 일은 다반사다. 집중력을 잃으면 꼭 사고를 친다. 하 루는 유리를 물로 닦는데 물감을 푼 듯 붉은색이 번지더란다. 그게 피라 는 걸 안 건 한참 뒤였다. 유리를 다루는 연장도 큼지막하다. 전기드릴에 전기톱에 콤프레서 등 건축공사를 방불케 하는 장비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이사하는 데만 트럭 서너대가 필요하다. 유리가루 알레르기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살갖이 따갑고 아파 배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돌아오니 한국은 많이 변해 있었다. 자고나면 대형건물이 들 어섰다. 그 덕에 일감은 끊이지 않았다. 작업기간만 6개월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도 꽤 성사시켰다. 그러는 10년새 욕이 많이 늘었다. 서울이 사 람을 거칠게 만드는 것같다고 한다. 성공회 성당의 색유리나 예술의 전당 벽화, 한화증권 앞 조형물을 제작하면서 제작부터 완공까지 돈과 사람들 과 사사건건 입씨름을 해야 했다. 자기가 지은 건물이라고 다른 사람의 손길을 마다하는 건축가들의 고집에는 기가 질렸다. 허가니 심사니 세금 이니 하며 딴죽을 거는 관공서들을 상대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유리 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지 못하고 세상과 다퉈야 하는 삶이 조금은 부끄럽 다.
사진 정진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13일 제 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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