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여행기 1.연길,용정을 둘러보고 백두산 밑 이도백하로...
7월 12일 월요일 9시 15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46명 일행은 2시간 반 걸려
예정시간인 10시45분(현지시간 1시간 늦음)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밖에 나오니
역시 부슬비가 내리고 있다. 도문에 있는 이건산업 공장의 책임자 두 분이 영접을
해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두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연길시내로 향하였다.
여행객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비다. 시내 한국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작년에 여행한 계림의 한국식당보다 음식이
못한 것 같다. 한식도 아니고 중국음식도 아닌 중간형태지만 한국인이 좋아하는
김치가 없다. 된장국 맛도 입맛에 맞지 않는다. 연길이 발전의 낙후지역임을
음식문화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연길(延吉)은 길림성에 속한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로서 인구의
절반정도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연변(延邊)은 총인구 약208만 명 중 약 82만 명
(43%)이 조선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족의 약 50% 정도가 농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연길(延吉)은 인구 약35만의 도시로 조선족의 문화적 중심지이며 주민의 절반
정도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1999년 기준 숫자이므로 지금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식사 후 연길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용정으로 향하였다.
연길은 조선족자치지역이라 간판의 위에는 한글, 아래에는 한문이 표기되어 있다.
한글도 북한체, 남한체가 공존한다. 미국의 L.A.는 한글전용도 있고 한영혼용도 있어
다양하지만 이곳은 통일되어있다. 체제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정부에서
한글을 위에 쓰도록 허용하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겨진다. 가는 길에 우측멀리 비암산 위에 일송정의 정자가 보인다. 독립투사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용정시내를 가로질러 흐르지만 흐르는 물이적어 강이라기
보다는 한국의 개천처럼 보인다. 여행경험으로 얻은 판단은 남한(南韓)은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용정시는 일제치하 독립운동의 성지라 할 정도로
민족정신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윤동주시인의 고향이고 유명인사를
배출한 학교 들이 있다. 교문에 룡정중학교라고 한글로 적혀있고 우측에 대성중학교라고 새겨져 있는
옛 건물이 있고, 다시 그 옛 건물 앞 우측에 윤동주시비(詩碑)가 있다. 구건물
대성중학교는 역사관으로 쓰여 지고 있다. 여직원이 요약해서 설명을 한다.
대성중학교, 은진중학교, 영신중학교, 동진중학교, 영신여자중학교, 광명여자
중학교 6개학교의 합병으로 지금의 용정중학교가 1946년 9월에 설립되었다.
유명인사로는 강원룡 목사, 문익환 목사 오리선생 전택부, 청년문사 송몽규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대성중학교 역사관이곳이 고향인 윤동주 시인은 은진중학교, 평양숭실학교,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거처, 일본 동지사대학교 재학 중에 독립운동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나는 문학도는 아니지만 한글 궁서체 붓글씨를 배울 때 윤동주시인의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를 여러 번 쓴 기억이 있어 더욱 친근감을 느낀다. 한국인의 급한 성질에 비위를 맞추는 것인지 여행스케쥴이 바쁜 것을 아는 지
중요한 요점만 설명하는 것으로 끝을 내고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성금을 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나오면서 윤동주시집을 사천원 주고 샀다. 작년에 상해임시정부건물을 방문하여 브리핑을 받을 때는 감격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이곳은 독립투사들의 활약상을 설명하는 곳이 아니고
학교의 역사를 설명하는 곳이므로 감동보다는 조선자치주의 사립학교로 중국인
학교보다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생각과 전통에 빛나는 학교의 명맥을
유지시켜 주기위해 조그만 돈이지만 장학금으로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윤동주시비(詩碑)
버스에 올라 다음 목적지인 백두산을 향하여 달린다. 가이드가 젊은 미혼의
처녀로 세대 차이를 느낀다.
구세대인 우리는 역사시간에 간도(間島)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간도는 중국
동북 지역 만주의 지린성(吉林省)을 중심으로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
(黑龍江省) 일대의 한국인 거주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인구는 약 2백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용정이 간도의 수도역할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 용정의 인구는 약23만명 정도로 연길보다 적다.
연길이 더 발전 가능성이 있다.
이번 방문으로 조선족이 거주하는 이지역의 발전이 낙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민족으로 이지역의 장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남북한, 세계최다의 인구 중국에 얹히어 사는 조선족
들은 동병상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생각이 다른 이 세 가지 집단의
연결고리를 생각하게 된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열심히 살아가는 재미동포들의 경제적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일예로 뉴저지 알파인 고급주택가에 교민들이 많이 입주해
산다는 말에 위안을 받았고, L.A.의 한인들도 과거의 흑인 폭동의 아픔을
딛고 재기하여 고급주택가에 사는 교민들이 늘어났다는 말에 교민들의
장래가 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곳의 조선족은 한국으로 밀입국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들이 아직도 지배적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중국의 국력이 커지고 있어서
인지 중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은근히 암시한다. 대한민국 국력의 신장만이
동병상린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민족에게 민족자치를 허용하는 중국의 정책이 궁금하다.
자료를 찾아 요약해 보았다.
1).중국헌법에는 오늘의 중국은 각 민족들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임을 명백히
밝혀 놓고 있다.
2). 민족구역자치는 중국 공산당이 1940년대부터 해방구에서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3).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 소수민족문제가 하나의 과제로
인식되어 1952년 中華人民共和國 民族自治實施綱要를 발표하여
소수민족자치지구를 허용한다.
민족구역자치의 실시의 기본적 원칙으로는
(1). 각 민족 자치구역의 자치기관은 민족 자치를 실행하는 소수민족의 인원으로
주로 구성되고 그 지역의 기타 민족은 적당한 숫자의 대표를 갖는다.
(2). 자치기관은 그 지역 소수민족 가운데 통용되는 한 종류 혹은 여러 종류의
언어, 문자를 직권행사의 도구로 삼는다.
(3). 자치기관이 직권을 행사할 때는 민족의 특징과 풍속, 습관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4). 자치기관은 그 지역 민족의 특징에 따라 자치조례와 법률, 규정을
제정하도록 한다.
(5). 자치기관이 각 민족 자치구의 재정권을 행사할 때는 기타 동급 정부보다
훨씬 큰 권력을 향유할 수 있다.
4).현재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 소수민족은 45개이다.
5).1996년의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총 인구는 12억 2천3백89만 여명이며 그 중
한족이 약 93.3%이고 기타 55개 소수민족이 8.1%를 차지한다
가장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은 장족으로 야1,500만 명이다.
소수민족에 대하여는 법적으로 하나 낳기가 적용되지 않는 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6).대만의 독립을 저지하는 수단의 하나로 소수민족자치를 허용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요사이 중국의 의도적인 고구려역사 왜곡시도는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독립 가능성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오늘 우리가 머무를 숙소인 백두산입구까지 4~5시간을 달려가야 한다고
한다. 흐린 날씨에 주위에 펼쳐지는 경치는 야산과 논밭이다. 지루하여
지도를 돌려가며 보았다. 직선거리가 아니고 약간 우회하여 달리고 있다.
김승만 왕회장께서는 준비해온 사탕을 돌린다. 일행을 위한 치밀한
봉사정신에 다시 감사를 표한다. 많은 동문들이 간식거리를 돌려서 받아먹기 만
하는 나는 미안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휴게소에서 고구마 말린 것, 붉은 색 껍질의 과일 등을 사서 차안에서
나누어 먹으며 무료를 달랜다. 오기 전에 장석정 동문이 5년 전에 백두산
관광을 하면서 부인이 귀국 후에 설사로 애를 먹었다는 말을 들어 위가
튼튼하지 못한 나는 먹는 것에 아주 소극적이었으나 지나놓고 보니
기우에 불과했다.
산의 나무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다. 북쪽 지역이라 한국의 나무보다
키가 적어 보인다. 낙엽송을 유심히 보았다. 역시 키가 작고 색깔도
짙푸르지 않다. 지도에 보니 우리가 머무를 곳이 이도백하(二道白河)이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고한다. 갑작스럽게 대관령의 홍송과 같은 소나무가
보인다. 키가 훨씬 크고 곁가지가 없이 쭉쭉 뻗어 올라가서 훨씬 아름답게
보인다. 美人松이라고 한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으레 키 큰 침엽수 들이 나타난다. 요세미티에는
세코이아 나무가 있는 데 이곳에는 미인송이 있다. 나의 견해로는 이곳의
지하수와 토양이 미인송이라는 아름다운 나무를 자라게 한 것 같다. 백두산이
특별한 산임을 간접적으로 입증해주는 증표이다. 신달호텔 주위에 미인송이
군락하고 있어 호텔의 인상도 좋아진다. 그러나 호텔시설은 좋지 않아
실망했다. 좋은 시설을 갖추고는 수지 맞추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이해가 갔다.
포도주와 산소주로 항상 동문들에게 봉사를 해오고 있는 이종범 동문의
덕분으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많은 동문들이 전보다 많은 양의 술을
즐기는 것 같았다. 모처럼 부인들과 어울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져
백두산 관광을 마련한 김종남 회장을 비롯한 1.7산악회 여러분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일 백두산 등반을 앞두고도 개의치 않고
술을 즐기는 것을 보면서 동문들의 건강이 아직도 자신감으로 차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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