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분청자의 세계
윤 용 이
오늘은 우리문화 유산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문화유산인 ‘분청자(粉靑瓷)’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분청자는 국립중앙박물관, 리움, 호림(湖林)등 국내 미술관은 물론 일본의 여러 미술관에서 국보급으로 보존되고 있는 15세기 조선시대의 도자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분청자는 한 시대의 유물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 이천 여주 광주 등지에 있는 1,000여 군데의 도자요 중의 약 70%를 점유하고 있는 주종 제품이기도 합니다.
분청자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국보급 대우를 받고 있는 이유는 가장 독특한 한국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유석, 김원용, 최승우 씨등 선배 님들은 한, 중, 일 세 나라의 도자기의 특징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중국 도자기가 인위적으로 과장되게 치장을 한 경극의 주인공이라 하면 일본의 도자기는 잘 차려 입은 게이샤를 나타내고 한국의 도자기는 수수한 가정부인처럼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적 특색을 가장 많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 고려시대의 상감청자(象嵌靑瓷)의 뒤를 이어 나타난 분청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의 해맑은 비취옥 색깔의 고려 청자가 고려 말에 이르러 원(元원)나라의 지배 때문인지 재정의 부실 때문인지 점 점 어두운 시멘트 색깔로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자가 화장을 하듯이 청자 바탕위에 백토로 분장을 하여 색이 잘 나타나도록 하는 기법이 도입된 것입니다.
일본의 전통 미의식을 나타내는 말에 와비사비(侘.寂)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투박하고 간소한 모양을 말하는데 바로 우리나라의 분청자가 그들의 와비사비의 미적 감각에 딱 어울린다고 봅니다.
일본 전국시대, 100 여 년간 전쟁으로 모두가 불안 속에 살면서 일본의 지배 계층이 초조와 불안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다도(茶道)입니다. 이 다도(茶道)에서 필수 불가결한 도구가 찻잔인데 일본인의 와비사비라는 미적 감각에 어울리는 것이 조선의 분청자였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을 다완전쟁(茶碗戰爭)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전쟁이 조선의 분청자 찻잔의 확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 전국시대 한 성주가 모두가 불타고 도망 나오더라도 애지중지하는 찻잔을 갖고 나오면 대 성공으로 보았으며 지금도 일본에서는 조선 분청자 찻잔이 수백억원을 호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일본의 지배계층까지 신성시하는 조선 분청자 찻잔이 생겨났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15세기 조선 세종 시절, 위대한 한글의 창제가 불상한 백성들에게 널리 문자를 깨우치기 위한 왕도 정치의 일환이라고 한다면 이 분청자의 생산 장려도 귀족 양반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도자기 그릇의 대중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失錄地理志)에 보면 백토 분장 상감청자의 대중화를 위하여 전국에 424군데의 자기소(瓷器所)를 설치하도록 한 기록이 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사기장(砂器匠)의 자손은 사기(砂器)만 만들도록 법제화까지 시켜 놓았습니다.
이들 사기장들은 노비는 아니지만 가난한 서민층이고 일생을 사기만 만들도록 운명지워져 있기 때문에 부귀와 공명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무욕 무심한 가운데 오로지 도자기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였던 것입니다.
이들 조선 시대 사기장들은 흙,소나무,물 이 세가지가 있는 자연속으로 들어가 오로지 사기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다보니 손은 익을 대로 익어 눈을 감고도 하루에 2~3 백개의 사기를 만들어 낼수 있는 숙련도가 붙게 되었으며 무욕 무심한 평상심 속에서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인위적인 가식이나 남의 눈치를 볼것 없이 자유 분방한 표현을 해 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6세기 후반에 와서 일본인들은 이런 조선 분청자의 와비사비 멋에 반하여 우리나라 문경등 시골을 찾아 다니면서 비싼 값으로 분청자를 사 모아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까짓 사기그릇을 그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이제 이들 분청자의 실물 사진들을 보면 고려시대 상감청자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 분정자로 자리매김을 하였는지를 알 수 있으며 주로 물고기와 모란꽃을 주제로 하는 갖가지 문양과 표현 방식에서 550 여 년 전 우리의 조상들이 얼마나 자유 분방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이들 작품들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어느 것은 10억원이 넘는 경매가를 나타낼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 강의를 계기로 하여 여러분들도 가까운 미술관에 가서 조선 분청자의 아름다음을 다시 한번 감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설명
1. 막사발
이 그릇은 청자나 백자와는 달리 불가사의한 면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분명히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에 알려지면서 그곳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그릇의 한류 바람이 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릇은 한국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최상의 막사발은 모두 일본에 있습니다.
이 그릇이 일본에 알려지자 어떤 일본 도공은 “이런 그릇을 일생 하나라도 만들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하고, 어떤 일반인은 “이 그릇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기만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다인은 이 그릇은 성 하나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신성한 그릇이라는 의미로 신기(神器)라 부르면서 그릇을 모셔놓고 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2.자유분방한 표현 분청자
3.분청자 조화선조문편병, 리움
4.분청자 선각어문발
5.분처자 선각모란엽문편병
6.분청자 어문선각편병,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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