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국가 안보
白 善 燁
저는 서울대학교 AMP 1기생으로서 당시 곽수일 교수의 초청으로 이자리에 나왔습니다. 올 해 6.25 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6.25 전쟁 을 회고하고 국가 안보를 강조하기 위하여 사진과 챠트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 세계의 각광을 받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핵심에 우리 한반도가 위치해 있는데 동쪽에는 경제 대국 일본이, 북쪽에는 13억 인구의 신흥경제 대국 중국이 ,그 위에는 세계 최강 군사대국인 러시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일본이 19세기 명치유신이래 20세기 초 쇼와시대에 들어와 중일전쟁,노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등으로 치달은 제국주의가 미국의 원자탄으로 종식을 고한 후 우리 한반도에서 북쪽 평양에는 소련군이, 남쪽 서울에는 미군이 각 각 입성하였습니다.
남한에서는 양영대군의 후손인 이승만 박사가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는데 1949년 당시 미 국무장관 에치슨이 발표한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 한다’는 <에치슨라인(Acheson Line)>은 결국 북한의 오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Acheson Line]
당시 북한에는 3,000명의 소련 군사고문단과 2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했는데 남한은 탱크가 한 대도 없어 소련제 탱크만 보면 그냥 도망갈 정도로 전력이 빈약했었습니다.
[1950년 6월 당시 남 북 군사력 비교]
그러나 1950년 6월 29일 소련의 야크기 공습속에서 수원비행장에 내린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들러보고 미군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 트르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UN군의 참전이 이루어 졌는데 그 80 %의 전비는 미국이 부담하였던 것입니다.
최후의 보루 부산교두보에서 미국의 워커장군와 한국의 정일권장군이 한 달 반 동안 낙동강을 사수하였는데 만일 이 부산 교두보가 무너졌더라면 대한민국은 지금 지도에서 찾아 볼수 없을 것입니다.
[1950.8~9 부산교두보 구축]
이 부산교두보 전투에서 제가 왜관의 북쪽 다부동 전투에 참가할 당시 29살이었고 당시 미군의 프리만 대령이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부산 교두보 사수를 바탕으로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10월 19일에 평양에 입성하고 10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10만명이 운집한 평양시민에 향하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평양에서 미1군단장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백선엽 1사단장]
<중공군의 개입>
[1.4후퇴 당시의 대동강>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는데 중공군이 참전하여 UN 군은 2개월만에 1951년 1월 4일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는데 그 당시 제가 UN군 측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습니다.
[휴전회담의 UN군측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한 백선엽 장군]
그 해 말에는 제가 지리산 대토벌작전을 벌여 소위 소비에트 특구를 해방시켰는데 그 당시는 제주 4.3 사태의 잔당과 낙동강 전투에서의 패잔병등 공산당원 빨치산 들이 특구를 이루어 공출은 물론 부녀자의 납치,심지어 세금징수까지 한는 등 경찰이 접근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리산 토벌작전]
1952년 12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한국군의 전력 증강이 시작되었는데 제가 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두달에 1개 사단을 늘려 나가는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통일의지에 맞추어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 통일을 하자는 데모가 한창이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원용덕 헌변 사령관에게 지시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결단을 내려 그 소식을 들은 영국의 처칠 수상이 면도하다가 그 소식을 듣고 놀라서 얼굴을 베었다는 일화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한국과 미국간의 치열한 교섭 끝에 10억불의 경제 원조와 한국군의 지원등이 약속되면서 휴전반대를 중단한다는 약속을 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었고 1954년 11월 18일에는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과 한국의 변영태 외무장관이 한미 방위조약을 조인하기 이르렀습니다.
한국군은 그 후 계속 전력을 보강하여 60만 병력 체제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여기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6,25와 함께 잊어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Feedom is not Free]
최근 천암함 사건이 발생하여 새삼스럽게 안보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우리는 현재도 상존하고 있는 북한의 특공대에 대한 경각심과 함께 치밀한 대책을 수립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40년동안 이부대를 통해서 청와대 공격, 랑군 테러, KAL 기 폭파등 만행을 자행 해 왔는데 그 병력을 20만까지 증강시켜 온 북한의 저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정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워 2012 년 4월 전시작전권을 회수한다고 했는데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심사숙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경청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글은 10.5.11.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17회 포럼에서 백선엽 장군이 강의한 내용을 심명기 동문이
요약한 것을 이곳에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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