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의 바른 인식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李 泰 鎭
사회자가 저의 3.1문화상 수상을 소개 하였는데 함께 학술원 회원이신 17포럼의 곽수일 회장의 성원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여러분과 같이 박정희 대통령이 서기(西紀)로 바꾸기 전 檀紀 4294년에 서울대학에 입학한 소위 단기학번 (檀紀 學番)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 근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저는 역사학자로서 우리나라의 제1차 근대화 운동은 1880 년대에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동안 우리가 배워 온 것은 그 당시 우리나라가 무능하였기 때문에 한일 합방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이 한국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歷史歪曲입니다.
우리 高宗은 21살 때 아버지 大院君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면서 開明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이며 나라의 근대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역부족으로 일본의 무력에 의하여 무너진 것입니다.
大院君은 서양의 기독교가 들어오면 전통 유교가 죽는다고 하여 천주교를 탄압했지만 高宗은 서양 문물을 받아 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선교사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하고 오히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 高宗이 정치가로서 스스로 서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건립한 건물인데 여기에 1887년 전기시설을 하고 관문각(觀文閣)이라는 서양건축을 세웠습니다. 현재 건청궁은 복원이 되 있는데 일제의 훼손으로 없어진 관문각은 설계도가 없어 복원을 못하고 있습니다.
高宗의 전기시설은 일본보다 2년 늦은 것인데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이미 설치된 전기 통신시설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동학란의 농민 봉기를 토벌하기 위해 천안으로 출병하였지만 일본군은 1개 여단을 효창공원에 주둔시키고 1894년 7월 23일 0시 30분 경복궁에 바로 진입하여 高宗이 총책임자인 조선의 전신시설을 강제 접수한 것입니다.
당시 일본 종군화가의 그림을 보면 서양건물인 관문각과 함께 시계탑이 보이는데 이 시계탑도 高宗이 서양문물을 도입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2년 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일어났는데 최근 김문자(金文子)라는 분이 이 시해(弑害)는 일본천황을 수반하는 대본영(大本營)의 살해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아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즉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조선은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는데 일본 내에서는 양론으로 갈렸다고 합니다. 온건파는 조선의 전신시설등을 장악하여 청군에 이겼으니 청으로부터 받는 배상금 2억엔 중 300만엔을 조선에 주고 군대를 철수하자는 의견이었고 강경파는 시설관리를 명분으로 1개 대대를 주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강경파의 주장대로 대본영이 군대를 주둔시키고 급기야 황후시해까지 지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高宗의 군주권 회복과 근대화의 열망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의 출범이라는 사실에서도 엿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를 高宗의 제2차 근대화 운동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호에서 조선을 피하고 대한으로 한 것도 과거 조공국의 이미지를 불식 시키려는 의도이었으며 1900년에 벨기에 형 영세중립국 운동을 벌이고 1900년 11월 한국-벨기에 통상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벨기에 신디케이트론으로 해외 자본 유치를 추진하였으나 일본에 의하여 취소가 된 적도 있습니다.
高宗은 1899년 5월 전차를 개통시켰는데 이것은 일본보다 3년이나 앞 선 것입니다.1904년 2월 13일자 영국 잡지 Black & White 표지에는 일본군이 서울에서 전차를 뺏어 타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高宗은 국토개발 마스터 플랜도 수립하고 서울 도시도 개조하였습니다. 서북철도의 건설을 비롯하여 독립문의 건설, 탑골공원과 음악당의 건설 등이 그것입니다.
문제의 을사조약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약의 제목도 없고 필체도 동일인이 쓴 것이 분명하여 조작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상과 같이 高宗의 근대화 노력이 남달랐다는 사실을 저는 역사학자로서 부끄럽게도 1995년에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전공분야는 원래 조선시대인데 연구를 하다보니 조선이 쉽게 망할 나라가 아니라는 확신이 섰고 그래서 무능하여 나라를 빼앗겼다는 주장에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연구 결과를 토대로 2,000년에 ‘고종시대 다시보기’ 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한일 두 나라의 근대화 노선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일본은 무사도(武士道)의 쇼부 근성( 勝負 根性)을 기본 정신으로 하고 팽창주의 성향을 보였으나 한국은 유교의 인정(仁政)을 기본 정신으로 하고 평화 공존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승계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앞 선 상해 임시정부 , 그 앞의 대한제국 ,그리고 조선왕조까지의 연계성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제3 공화국이래의 눈부신 경제 개발의 역사도 高宗 시대와의 연계성을 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울러 ‘버리고 싶은 한말의 역사’ 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서 식민지 근해화론의 폐해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글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17회 포럼에서 이태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심명기 동문이 요약한 것으로, 이곳에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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