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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다시 보기

우리 역사 다시 보기

 

일시:2010년 11월 9일 08:00시

연사: 허 성 도 박사

서울대학교 중어 중문학 교수

한국 사료연구소 소장

 

유럽에 가보면 우리나라에 비해 유난히 동상이 많다는 것을 느끼는데 그 것은 그들이 선조들의 업적에 대하여 박수를 많이 보냈고 우리는 칭찬과 박수에 인색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교수로서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어느 곳이라도 6.25 당시와 현재의 사진을 비교해 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기성세대에게 얼마나 많은 박수와 존경을 보내야 하는 지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국사를 배울 때 조선이 500여 년 만에 사색당파 싸움 등 이유로 망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세계 어디에도 한 왕조가 500년 이상 지탱한 예는 조선외에는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신라가 나라를 세운 B.C. 57년 이래 신라는 992년 ,고구려는 705년 ,백제는 678년, 고려는 474년, 조선은 518년 등 이렇게 긴 기간을 한 왕조가 지탱한 예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나라 왕조가 그렇게 오래 지탱할 수 있었던 저력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는 "기록의 정신" 입니다.

 

이집트는 30만 명의 노역으로 20년 걸려 만든 피라밋을 자랑하지만 조선은 태조부터 고종까지 500년 동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사무관 급에 해당하는 사관(史官)이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매일 기록한 이 문서는 6,400만 자에 달하는데 객관성을 위하여 왕을 비롯하여 누구도 지나간 실록을 열람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정하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 있습니다.

 

세종대왕도 태종의 실록을 보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지만 결국 황희 재상의 건의를 받아 들여 어느 왕도 실록을 열람하지 못하도록 교지를 내리기까지 한 것입니다.

 

승정원일기(丞政院日記)는 소위 대통령 비서실의 일기로서 원래 개국 이래 작성되어 왔으나 임진왜란 때 전반부가 소실되어 인조1년(1623년) 부터 순종 4년 (1910년 )까지 288년간의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지진(地震)의 기록만 보더라도 삼국사기에는 87회 삼국유사에는 3회 고려사에는 249회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 회의 기록이 있습니다.

 

저의 소망은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 머릿돌에 " 이 장소는 위와 같은 우리선조의 기록에 의하여 2,000년 동안 한 번의 지진 기록이 없는 위치'라는 것을 명시하여 우리 선조들의 기록 정신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민의를 반영하는 정치 " 입니다.

 

농지세 개정의 예를 들면 세종이 세종 12년에 국민에게 묻기로 한 이래 세종 18년에 1,2년 동안 시험 시행을 하도록 한 뒤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듭한 결과 13년만인 세종 25년에 공포 시행한 일이 있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나옵니다.

 

추관지(秋官志)란 형조(刑曹) 에서 발간한 조선의 법률집, 판례집, 재판기록인데 이를 통해 현재의 삼심제(三審制)와 같은 삼복제(三覆制)를 당시에도 시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관찰사가 한 시골 머슴이 사람을 죽인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어찌 하오리까 라고 형조에게 문의 편지를 보냈을 때 형조에서는 물증이 없으면 무고한 사람을 처벌할 우려가 있으니 무죄방면하라는 공문을 보내는 기록이 있습니다.

 

추관지 기록을 보면 "15세 이하와 70세 이상인 자는 살인강도를 제외하고는 구금하지 않는다." ," 10세 이하인 자와 80세 이상인 자는 사죄(死罪)를 범했을 지라도 구금하지 않고 속(贖)을 받는다.", "70세 이상인 자는 정배하지 않으며 장형을 받지 않고 대신 속(贖)을 받는다' 등 인권문제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출산휴가제도를 예를 들어 보더라도 세종이 관청 여자 노비들의 출산 시 사망률이 높은 이유를 조사 시키며 처음에는 출산 휴가를 7일을 주었다가 출산 중 죽는 일이 많음을 보고 받고 출산 휴가를 100일로 하고 출산 전, 한 달간의 휴가를 더 주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또 세종실록 16년 (1434년) 4월 26일의 기록에 보면 "여종이 산달에 임한 자와 산후 100일 안에 있는 자에게 사역을 시키지 않도록 법을 제정하였으나 그 남편에게는 휴가가 없어 산모를 돌보아 줄 수 없게 되니 이는 부부란 서로 도와야 한다는 취지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산모가 죽는 일까지 있으니 진실로 가여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근무하게 하라" 고 지시한 기록도 있습니다.

 

셋째는 "과학 과 수학의 중시 " 입니다.

 

세종 15년 (1433년 )에 세종은 정인지 이순지 김담 등에게 조선의 달력 제정을 명하였습니다. 1442년에 완성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에서는 일식과 월식의 예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1444년에 완성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에서는 이순지(李純之, 1406?~1465) 등에게 회회력(回回歷)의 연구를 명하고 이를 참고하여 개정한 달력을 완성하였는데 이 외편(外篇)에서의 1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로 되어 있는데 현대의 1년이 365일 5시간 48분 46초이니 단 1초만 차이가 날 정도로 과학적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자기 자신의 달력을 가진 나라는 아라비아와 중국 그리고 조선 등 3개국뿐이었을 정도로 우리나라 천문학은 앞 서 간 것입니다.

 

이순지가 한양의 위도가 38도라고 계산하고 있는데 한양의 실지 위도는 37.35도인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천문학이 발달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은 중국으로부터 달력을 받아서 써 오다가 우리 자신의 달력을 만든 이순지에게 천문학을 더욱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고 천문대 책임자인 서운감을 당시 영의정 (정인지)이 겸임하도록 각별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래로 국립천문대장은 영의정이 겸임하는 제도가 굳어 졌고 6조 내각이 광화문 밖에 있을 때 서운감은 왕궁 내부에 위치하였던 것입니다.

 

외편(外篇)에서는 세종 29년 (1447년 )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하여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날 것이라고 예측하였는데 이것은 오늘 날 천문학상으로도 정확한 예측인 것입니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수학서 '주해수용(籌解需用)" 에는 "구체의 체적이 62.208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 는 문제를 냄으로써 sin, cos ,tan, cot 를 다루고 있습니다.

 

홍대용은 지구둘레는 9만리(36,000 km) , 지구지름 28,648리 (11,459km)로 기술하고 있는데 실제의 지구 둘레는 40,000 km , 지구지름 12,756km 입니다.

 

서양에서는 1492년 처음으로 국립대학이 설립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신문왕 2년 (682년)에 국립대학인 국학 태학감을 설치하고 수학과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산학박사(算學博士)는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 등을 교육시키는데 구장산술의 내용은 사각형의 넓이. 비율 분수, 방정식(方程式)등을 다루고 있어 오늘 날의 수학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방정 (方程)"이란 용어가 이미 구장산술(九章算術)에 등장하고 원주율 π 를 "밀류지"라고 하여 3.14159로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오래 지속한 배경에는 "기록의 정신"," 민의를 반영하는 정치",그리고 " 과학과 수학의 중시" 등 요인이 그 배경이라고 설명을 드렸는데 결론은 이러한 소중한 기록들이 모두 한자로 기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한자 기록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한문전공자들을 많이 양성하여 세계사에서 빛나는 우리 조상들의 업적을 하루 빨리 우리 후손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한문 전공자의 양성의 중요성에 대하여 여러분 선배님들의 이해와 성원을 바라면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글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17회 포럼에서 강의한 내용을 심명기 동문이 요약한 것을 이곳에 전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