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의 방

◆복자 윤지충 바오로 순교자에 대하여 성체예수님에게 기도드림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 순교자에 대하여 성체예수님에게 기도드림

 

2015.5.29.() 오전 10시 죽전1동 하늘의 문 성당 미사 참례

 

오늘은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미사 후에 자리에 앉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감실에 계신 성체예수님

 

윤지충 바오로 복자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을 전에 인터넷에서 읽었고, 평화방송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조상께 드리는 제사를 끝까지 거부하여 순교하셨다는 내용이 강조되었습니다. 이씨 조선 왕조는 유교를 숭배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용납이 안 되는 불효이며 불충의 행위였습니다. 조상이 후손을 돌보아 준다는 사상이 모든 국민에게 각인(刻印)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 복자께서는 학식이 높은 분으로,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를 거부하고 하느님 숭배를 택하여 순교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는 목숨을 건 용기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이시고 삼위일체이신 성부하느님을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경로를 통하여 확고하게 믿어 순교까지 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불교의 참선과 유교에 속하는 주역의 명상이 그 당시는 지식층에게는 보편화되어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 복자께서도 천주교교리를 책으로 읽고 교우끼리 만나 교감(交感)하고, 명상(묵상)을 통하여 창조주 성부하느님, 우리 주 성자예수그리스도님, 그리고 성령님을 만났다고 상상이 됩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강림하시어 하느님의 뜻 지식들을 가르쳐주셨다고 상상을 합니다.

묵상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상상을 합니다. 그러므로 순교가 가능합니다.

 

성체예수님

 

우리민족은 묵상에 강한 장점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2014.8.15.에 함께 시복된 복자 정약종이 그의 고종사촌입니다. 정약종의 어머니가 윤지충의 고모가 되는 것으로 자료에 나와 있습니다.(위키 백과에는 내종숙 5촌으로 나와 있음. 윤지충의 대고모 할머니의 아들이 정약종).

 

 

순교자는 아니지만 천주교신자이므로 전라남도의 흑산도로 유배(流配)를 당한 손암(巽菴) 정약전 선생이 떠오릅니다.(흑산도에 가보았음) 손은 주역(周易)에서 많이 사용하는 한문 글자로 바람(대기)을 의미합니다. 손암선생 역시 명상으로 주역을 통달한 분이라고 상상합니다.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고종사촌 형제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명상의 대가라고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못난 작은이와 공통점이 많은 분들입니다. 명상의 수준이 저보다 아주 높은 분들이라고 상상이 됩니다. 사제 신부의 지도를 받지도 못하고 한문으로 된 교리서를 읽고 고종사촌 형제들과의 교감으로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도 하는 경지에 도달하고, 성령이 강림하시어 성령님으로부터 하느님 뜻의 가르침을 받는 경지에 스스로 도달하여 순교까지 하였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성체예수님

 

이런 잠재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이 아시아의 그리스도교의 중심국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님, 신자들 중에서 이와 같은 순교자 분들과 같은 잠재능력을 가진 분들을 많이 발굴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들에게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어 순교자를 닮은 분들이 앞으로 많이 나오리라고 믿습니다.

 

성체예수님, 성령님, 이 분단된 불쌍한 작은 나라를 빛으로 밝혀 주시어 동방의 빛나는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체예수님 안녕히 계십시오.

( 이 기도 중에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는 감응을 주셨습니다.)

-------------------------------------------------------------------------------

유교를 나라의 종교로 택한 이씨 조선시대에는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유교교리에 따른 중요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11대 종손으로 저의 부모님 때가지는 4대봉사(奉祀)를 하여 여덟 분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12시가 넘은 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가 이어지니 조상만 숭배하고 하느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그 때에는 상상조차 못하였고, 중학교부터 외지에서 생활을 하여 동급생 개신교시자들로부터 신자가 될 것을 권유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1715년 발표된 교황 클레멘트 2세의 조상 제사 금지 칙서는

1.하느님을 상제(上帝)나 천()이라 할 수 없다. 반드시 '천주'(天主)라고만 해야 한다.

2.공자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는 안 된다.

3.죽은 조상의 위패에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신위(神位)라고 쓸 수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용기를 보였고 이로 인하여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조상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받아 드리지 못하여 배교를 하였다가, 다시 신자가 되어 두 분 다 유배를 당하였습니다.(정약전은 1790년 제사를 금지하는 베이징대목구장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이 조선교회에 전해지자 신앙을 버렸다. 평화신문 2014.4.13. 오세택 기자 기사가 있음)

 

 

윤지충 바오로 복자의 신앙심이 더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39128일 발표된 로마 교황 피우스 12세의 교시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시대의 변천과 민간의 풍속, 정신이 바뀌어 진 현 세대에 와서는 조상에게 효성을 표시하고 추모하는 의식(儀式)이 되었으므로 허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부모님과 조부모님 제사는 지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숭배하지만 조상님은 하느님과 같은 수준으로 숭배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회상하며 감사를 드리는 수준에서 머뭅니다. 개신교에서 제사를 금지하는 것 보다는 현명한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