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보고 싶었던 호지민시(사이공)와 구찌 땅굴 관광 소감 ★ 90세이신 장인어른께서 건강에 자신이 생기셔서 사이공시를 보고가자는 제의로 관광 스케쥴에 없었던 호지민시를 보게 되어 모두들 좋아했다. 12 월 9일 밤 7시반경에 도착한 호지민시 탄손누트 공항은 하노이공황 보다 훨씬 큰 국제공항이다. 우리일행이 타고 가는 버스도 45인승 대형버스다. 하노이와 차별을 느낄 수 있다. 저녁식사를 한식 식당에서 야채 쌈 된장 찌개 등 순수한국음식을 들었다. 장인어른께서 기분이 좋으셔서 현지 39 도 술을 시켰으나 맛이 이상해서 참 이슬을 주문하여 남자들 네 사람에 게 계속 권하여 꽤 마셨다. 장인어른의 기분이 좋으시니 동행한 사람들도 즐겁다. 내일을 위하여 장인어른의 권주에 제동을 걸어 장인어른께서는 식사도 별로 못 하시고 호텔로 향하였다. 왼쪽이 르네상스 호텔 우리가 머문 호텔은 르네상스 호텔 별 다섯 개의 일류 호텔이다. 하노이 의 대우호텔보다 한 단계위인 호화호텔이다. 호지민시가 하노이보다 큰 도시라는 것을 호텔비교로 실감할 수 있다. 쉐라톤 호텔 12월 10일 금요일 아침 호텔 창문을 여니 바로 앞이 사이공강이다. 호텔 에서 동쪽 저 멀리까지 넓은 평야뿐이다. 강의 부두는 잘 가꾸어지지는 안했으나 여객선 화물선들이 오간다. 카메라를 들고 산책을 나갔다. 횡 단보도에서 사람과 오토바이가 흐름에 맞추어 서로 피해주면서 길을 건 너갔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요령이다. 공원에 들어섰다. 자스민 향기가 코 를 자극한다. 공원에 큰 항아리 화분에 분재처럼 큰 자스민 나무를 심어 놓았고 하얀 작은 꽃에서 향기가 쏟아져 나온다.꽃향기가 넘치어 퍼지는 작은 공원을 산책하기는 처음이다. Tren Hung Dao 동상을 넣어 르네상 스 호텔과 쉐라톤 호텔을 사진에 담았다. 두 호텔의 규모가 아주 크다. 사이공 강, 배에 오토바이와 사람이 함께타고 출근..  르네상스 호텔에서 바라본 사이공 강의 모습 아침 8시경 베트콩 땅굴이 있는 구찌를 향하여 호텔에서 출발하였다. 호 지민시의 인구는 540만명 정도, 강우량은 1,950mm/년, 제주도 강우량이 1,850mm/년이므로 이곳은 우기에 한국보다 조금 비가 많이 온다. 건기 인 12월의 이곳 날씨는 한 낮에는 30도까지 상승한다. 오늘도 맑은 날씨 에 따가운 햇볕을 느낀다. 어제 비행기 안에서 읽은 베트남 영자신문에 “남부베트남 1인당 국민소득이 미화1,800불”이라고 한다. 남과 북의 소 득격차가 점점 벌어지나 보다. 아마 호지민시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불화 2,500불 가까이 될 것이고, 하노이시는 이곳의 3분1정도에 머물 것으로 추측된다. 시내에 고층 건물들이 눈에 뜨인다. 하노이를 1960년대 초의 서울과 비교한다면 호지민시는 1970년대 중반의 서울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노이에서 가이드로부터 인민의회 의원 직접선거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이를 확인하기위하여 호지민시 가이드에게 물어 보았다. 2002년도에 처 음으로 5년 임기의 인민의회 의원선거가 있었으며 투표율은 100%에 가 까웠다고 한다. 2007년에 또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하나의 정당뿐인 공 산당독재국가에서 투표로 선출한 의원 전부가 공산당원이다. 다만 투표를 실시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이야기를 하니까 가 이드가 이곳은 10호담당제가 실시되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의 부친이 이곳 을 방문했을 때 10호담당 책임자에게 신고했다고 한다. 철저한 통제정치 가 시행되고 있다. 베트남여자와 한국남자와의 국제결혼이 늘어나고 있어 결혼중매회사가 성업중이라고 한다. 베트남여자들이 농사일을 열심히 하 고 여자들이 일하여 남편을 부양하는 경우도 있어 한국의 농촌 노총각들 과 의 결혼이 성사되어 성공적으로 정착되고 있다고 한다.베트남 여자들이 한국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한류열풍의 산물인가? 라이 따이한으로 화제가 옮겨갔다. 라이는 2세라는 의미 2세 한인이 약 2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호적에도 못 올렸으나 지금은 법률이 바뀌어 어머니 호적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교회계통에서 지원을 하고 있으나 고생은 심하다고 한다. 2%정도만 파월 장병들의 자식이고 나머지는 이곳에 온 기술자 사업가 등의 자식이라고 한다. 아오자이가 성적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민속의상임을 와서 보 고 알 수 있었다. 흰색의 얇은 반투명 천이라 속옷이 비친다. 서양인들의 2세는 서양으로 많이 데려갔다고 한다. 한국남성들은 무책임(?)한 사람으 로 각인 되었을 것이다. 고무나무 숲  고무나무 수액 가는 도중에 고무나무 재배지역에 멈추어 고무의 원료 수액채취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구찌에 도착하여 베트콩의 지하땅굴을 소개 하는 흑백 한국말 녹음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땅굴모형을 그린 대형화면을 본 후에 땅굴 로 향했다. 구찌 땅굴 모형도 구찌는 베트콩 땅굴의 표본으로 사이공에서 버스로 두 시간정도 걸리는 40km 정도거리에 있다. 이 지역에 최초로 땅굴이 건설된 것은 프랑스 식 민지배에 대항하기위하여 1940년대에 만들어 졌으나 후에 친공산 베트콩 거점지역이 되었다. 터널의 총 길이는 250km에 달하며 지하로 3~4미터의 두께를 유지해 포격에도 견디어 냈다고 한다. 땅이 단단하게 굳어지는 특 수한 지질을 활용한 땅굴이라고 한다. 땅굴의 넓이50cm, 높이 70~80cm 로 좁아 체형이작은 베트남인들에게 이동이 적합하고 미군은 들어가기 어 렵다.  위장 땅굴 입구  소름끼치는 원시적인 덫..  원시적인 덫에 빠지면..소름끼친다 지하 3층으로 거미줄 같이 땅굴을 파놓아 식당 숙소 회의실 등이 마련되 어 있다. 땅굴 안에서 취사를 위해 불을 피울때 연기는 3단계의 정화과정 을 거쳐 밖으로 배출시켰다. 베트콩이 땅이 굳어지는 특수 지질과 좁은 땅굴을 만들어 미군이 들어 올 수 없게 하여 상대방에게는 신출귀몰하는 게릴라전을 전개, 미군과 월남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보 구엔 지압 장군 프랑스군 격퇴의 전략과 더불어 베트남인 들에게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전략이다. 땅굴에는 들어 가보지 않았으나 원시적인 다양한 덫이라든가 참호들을 구경하면서 섬쩍지근해진다. 안내 베트남 군인의 표정은 의기양양하고, 끼어든 젊은 한국여인이 미국을 욕 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호에서 총격전을 벌리고 땅굴로 도피  땅굴 숨구멍을 만들어 놓은 곳 월남 파병 한국군도 이곳 땅굴에서 처참하게 죽었을지도 모른 다고 생각 하니 소름이 끼친다. 영화에서 본 정글은 나무가 많이 우거진 것으로 보였 는데 30년이 지나 나무가 다 원상회복되었지만 이곳 정글은 나무가 밀집 한 곳은 아니다.  구찌의 정글 착잡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는 여행객의 비위를 맞추어 안내 를 하므로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곳에 와서 오히려 반미감정이 생길 가능 성이 높다. 걱정된다. 중국관광에서도 중국의 국력이 커지자 조선족 가이 드들도 모택동의 토지 국유화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여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체제로 세계최강대국이 된 미국과 심지어는 한국도 경시 하는 풍조가 점점 심화되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중국관광 젊은이들에 게서도 반미감정이 저절로 생길 것 같다.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생긴 반 미감정이 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체제까지도 부정하는 어리석은 판단으 로,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치기 쉬운, 젊은이들에게 확산되지 않을 까 걱정이 된다.  구찌 땅굴 내부 가이드의 말과 인터넷에서 검색한 자료 등을 종합해서 베트남의 통일 과 정을 보면, 월맹의 지도자는 평생 독신의 호지민, 프랑스군을 무찌른 보 구엔 지압 장군 등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 북에 있다. 가 난이 평준화 된 북쪽은 개방으로 빈부의 격차가 크고 부정부패가 심한 남쪽보다 오히려 민심의 분열이 적다. 남쪽은 친 서방주의 정책을 펼 수 밖에 없는 처지인데 오랫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던 국민 정서에도 친 서방 정책이 환영받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프랑스가 물러간 공백을 미국이 메 울 수밖에 없었다. 고딘디엠 정권이 친미정책을 강화하자 프랑스에 대항 하기위하여 생긴 베트콩도 1960년 1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여 월맹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변신한다. 한편 1963년 11월 두옹 반 민 장군의 쿠테타로 고 딘 디엠 정권이 무너지고 그 후 10여 차례의 쿠테타 로 남부월남은 혼란에 빠진다. 1969년 2월에 공산군의 전면 공격이 개 시되었다. 미국이 북폭을 개시한다. 그러나 베트콩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미군이 직접 베트콩소탕작전에 뛰어들고 한국, 필립핀, 타이, 오스트렐 리아, 뉴질랜드 등도 파병을 하였다. 그후 1973년 1월 파리에서 미국 베트 남 베트콩 월맹간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공산군 은 협정을 위반하고 맹렬한 공격을 재개하여 공세가 베트남 전역으로 확 대되어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사이공을 점령한다. 이로서 30년간의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리고 적화통일이 이루어졌다. 자본주의 초기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빈부의 격차확대와 정 경유착, 부정부패, 반 서방경향의 국민정서 등이 친미 월남정부의 패배원 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월남민들에 의하여 막대한 미국의 군 수물자가 월맹군과 베트콩으로 넘어가는 와중에서 미국이 승리할 수 없 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통일된 지금, 남쪽이 북쪽 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잘 산다. 경제적 으로는 친 서방정책, 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원리가 성공한 것이지만 정 치적으로는 공산독재정권이 승리하였다. 자본주의 도입과정에서 개발 독 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월남의 친 서방정권에서 청렴한 지도자가 권 력을 잡아 강력한 개발독재 정치를 펴서 부정부패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펴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였다면 베트콩 나아가서는 월남 국민들이 친 공산월맹으로 기울지 않 았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켜 개발독 재정치로 18년간을 통치한 것을 지금 평가하려는 과정에서 국민들 간에 갈등이 생기고 있다. 베트남의 공산통일 과정을 이곳에 와서 보고 듣고 살피면서 우리나라의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는 실보다는 득이 훨씬 컸 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다. 호지민시로 돌아가는 길에 친절하고 음식이 깔끔하고 깨끗한 한국인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하노이 한국식당과 비교하면 한 수 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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