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의 방

◆19 08 23 (금) 매주 첫 주 토요일 성모 신심 미사만 참례함 앞으로는 모든 토요일에 인근 성당 미사에 참례하려고 생각하자 성령께서 눈물 감응 줌

19 08 23 () 미사 참례, 매주 첫 주 토요일 성모 신심 미사만 참례함. 앞으로는 모든 토요일에 인근 성당 미사에 참례하려고 생각하자 성령께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응을 반복하여 주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흠숭하올 성체 예수님

 

오늘 823일 금요일 오전 10시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마태오 복음 2234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 못난 작은이는 천상의 책을 읽고 기도를 드려 성삼위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 하느님의 사랑을 점점 알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복음 말씀을 하실 때는 2천 년 전입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의 저를 비롯한 결혼하여 가정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점점 악의 유혹에 빠져들어 사랑보다는 미움에 더 익숙하여져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오로지 부부간의 사랑만이 떠오를 뿐입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고 말씀 하시지만 저 자신을 일생동안 몇 번이나 스스로 사랑하였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이웃에 저의 아내를 포함 시켜 생각하여도, 저 자신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하였는지가,  잘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사랑에 너무 관심 없이 살아 온 것이 부끄럽습니다.

 

이 못난 작은이는 천상의 책을 읽고, 읽은 내용을 기도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어 기도를 드려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은총질서에 따라 하느님 뜻의 생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 하느님 뜻의 생명을 받으면서 성삼위 하느님께서 이 못난 작은이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시고, 점점 더 사랑하여 주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 피카레타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47년 동안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쓰게 하시었고, 그 어려운 하느님의 뜻, ‘피앗을 가르쳐 주시고 순례도 하여 주시어 성화시켜 주시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삼위일체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시므로, 예수님부터 사랑하여야 합니다. 2천년 가까이 항구하게 미사 성체성사를 통하여 밀떡()을 예수님의 몸과 피로 성변화(聖變化)시키신 성체를 받아먹게 하여 주시어 예수님의 인성의 생명을,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신적생명도 주시는 성체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 못난 작은이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시어, 지적측량 소송(피고)에 지쳐버린 저에게, ‘너를 돌보아 주겠다. 확고하게 믿어라. 힘내라.’ 라고 성체조배 때에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12년 만에 저의 승소(원고는 시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하여야 했고, 실제 경계 면적 침범이 없었다고 판결함)로 끝을 맺게 하여 주셨습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이 못난 작은이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고 실감하였습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먹으면, 예수님이 저를 점점 더 사랑하여 주시고,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어 주시어 이 못난 작은이와 하나가 되는 일치를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최근에 다시 깨닫게 하여 주셨습니다. 전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분당 성 마태오 성당 토요일 오전 10시 미사에 오랫동안 참례하였습니다. 용인 수지구 죽전동 하늘의 문 성당이나 효주 아녜스 성당에는 토요일에 매일 미사가 없고 특전미사만 있어서 성 마태오 성당 매일 미사에 참례를 한 것입니다.

 

오늘 이 못난 작은이가 복음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더욱더 사랑하려면, 토요일에도 전처럼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독서 말씀과 복음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몸과 피인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바로 성령님께서 제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응을 주시었습니다.

 

그리고 천상의 책 제12521918620일 말씀에서, 요약하면

 

미사에서 성체 안의 나를 축성하는 권한을 사제들에게 주어 영혼들에게 분배하게 하면서도, 영혼들이 내 뜻 안에서의 행위를 거듭하고 스스로를 포기하며 자기네 인간적인 뜻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뜻이 들어오게 하면, 이 영혼들을 축성하는 특권은 오로지 나에게만 따로 남겨 두었을 정도이다. 영혼이 내 뜻 안에서 행위를 거듭할 때마다 강력한 자석처럼 나를 부르기에, 내가 성찬 제정의 축성문을 거듭 뇌면서 그 영혼을 특은적인 성체같이 축성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 못난 작은이가 이 특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천상의 책 제18111925115일 말씀에서는

성체성사는 영혼들이 받는 그들 자신의 생명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스스로를 내주는 나 자신의 생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성사의 열매는 그들 안에 내 생명을 형성하는 것이니, 매번의 영성체가 내 생명을 성장, 발달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영혼이 '나는 또 다른 그리스도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혼들 안에 예수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을 영혼들안에 형성하여 주십니다. 매번의 영성체가 영혼 자신의 생명도 성장하고 발전하게 하여 주고, 영혼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도 성장하고 발전시킵니다. 이 두 생명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시므로(자비의 균형)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면 그 영혼이 나는 또 다른 그리스도다.’ 라고 말할 정도의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하게 하여 주십니다.

 

토요일 미사에 가지 않는 날에는 성령님께서 2시간 이상을, 하느님 뜻의 생명을 주시고 죄의 상처가 있는 곳의 물질대사를 다스려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성장과정을 기록하여 보아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인공지능으로 말을 문자로 바꾸어 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문자로 바꾸어 놓은 것을 수정하고 정정하여 저의 블로그에 올려야 합니다. 지금 5개월 이상 분이 밀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반드시 완전한 글로 작성하여 저의 블로그에 올려 질 것이라고 믿고, 매일 성장과정을 말로 기도드려 문자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정을 감안하시어 토요일에도 매일 미사에 참례하라고 성령님께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응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님께서 스테파노 곱비 신부에게 받아쓰게 하신 말씀 중에서 성체에 관한 말씀을 스캔 복사하여 올립니다. 출처 : 성모님 메시지를 주제별로 엮은 다락방 기도모임 강의 1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왕국'은 '예수 성체 왕국'의 승리와 동시에 도래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시어 온갖 고통을 다 겪으신 성체 예수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믿고, 미사에 참례하여 자기의 죄를 깨달아 고해성사를 한 사람들은 용서하여 주시어, 구원받게 하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마지막) 때입니다. 성체성사 영성체를 하여,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성체성사로 예수님의 인성의 생명을 주시고 하느님 뜻의 생명도 주시어 성화 시켜 주십니다.

 

전에 토요일에도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제가, 다시 토요일 미사 참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을 성령님께서 감지하시어 알고 계십니다.

 

미사 후에 묵상을 하였습니다.

토요일에도 매일 미사에 참례 하여 예수님의 인성의 생명과 하느님 뜻의 생명인 빛의 생명과 하느님의 심장박동이 저의 심장박동 안에서 고동 쳐 주시는 새 생명도 받고, 하느님의 사랑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를 직접 축성하여 주시는 특별한 은혜도 받을 수 있으므로, 토요일에도 매일 미사에 참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생각을 감지하신 성령님께서 또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응을 주시었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성당 임차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서둘러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기도를 드리는 저의 두 눈에 지금 눈물이 또 맺혀 있습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아멘

 



모세오경 통해 하느님 계시 완성됐다고 믿어 인간 자유의지 강조하며 부활천사영 부정

 

사두가이는 대사제 등 유다교 고위 성직을 독점한 집단이다. 그림은 '대사제 카야파 앞에 선 예수님'(조토 작, 14세기)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은 모두 야훼를 믿는 같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다양한 정신적 흐름이 있었고, 여러 종교적 당파들도 있었다. 사두가이파는 유다인들의 종교나 사회, 정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집단 중 하나이다. 사두가이파는 제관 계급이 주축을 이뤘다. 사두가이는 다윗 시대 대사제 차독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희랍문화에 개방적이었고 헤롯 왕조와 로마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사두가이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사두가이는 유다교 대사제와 고위 성직 계층의 직책을 독점하는 자들로, 바리사이들과 달리 영혼의 불사불멸,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이들은 하느님 심판도 없다고 주장했으며, 현세에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전부였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사도 23,8). 유다인들은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이 있었지만, 사두가이 들은 율법에 부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기에 부활을 믿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부활에 대해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루카 20,29-33). 

신명기에는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신명 25,5)고 기록돼 있었다. 사두가이들은 이 율법을 근거로 언쟁을 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명쾌하게 밝히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 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4-36.38). 

 

사두가이들은 바리사이들이 받아들인 구전 전승을 인정하지 않고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을 통해 하느님 계시가 완전히 이뤄졌기에 새로운 계시는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바리사이파는 하느님에 의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 의지를 동시에 믿었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여러 면에서 정반대 입장을 취했지만 예수에 대해 반대하는 일에서는 서로 합세하기도 했다. 율법을 극도로 보수적으로 해석한 사두가이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 사회에서 자기들이 누리는 부와 지위를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의 표시로 여기고 현 체제 유지를 옹호했다. 그래서 사두가이들은 백성을 더욱더 율법의 노예로 만들고, 율법을 통해 기득권을 누리던 자기들 입장을 정당화했기에 예수님과는 정반대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교구장 비서실 수석비서)

출처 : 가톨릭 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