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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천진암 앵자봉 산행기--‘등산로 아님’에 길 있다

블로그 주인 한영구가 참여하는 이 산악회는 대학교동기동창 산악회다.
동문 박정수 부인인 노순옥씨가 중앙일보 기자출신으로 산행기를 전담한다. 
김종남 고문은 백두대간을 2번이나 종주한 동문으로 산행길 기억력과 
리더십이 탁월하고 지덕체를 겸비하여 산악회원들로 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다. 지금도 산행지를 선택하고 안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사진촬영도 잘하여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17회, 약칭 1.7산악회 
백두대간 종주 책을 출판할 때, 사진의 대부분을 김고문이 촬영하였다.
자기희생과 양보정신이 몸에 밴 도인풍의 리더다. 책에서 김고문의 
사진은 별로 볼 수없다.
한영구도 이 산악회가 백두대간 종주를 끝낸 다음에  뒤늦게 산행에 
참여하여 사진촬영으로 산악회에 조그만 기여를하고 있다. 동문들의 
부인들도 백두대간 산행에 6명이 참여를 하였으나 지금은 3명이 
참여를 하면서 관광버스타고 산행할 때에 아침 간이식을 제공한다. 
봉사, 양보, 희생, 상호 존경, 상호신뢰심이 충만한 모임이다. 
본인을 제외한 회원들은 10년간 산행을 같이한 동문들로 친구이지만 
나는 이들 모두를 마음속 깊이 존경한다. 
지금은 여성동문인 김숭자가 회장을 맡고 있고 그녀의 부군인 장변호사도 
동문은 아니지만 산악회에 참여하여 백두대간 완주를 같이 하였다. 본인은 
장변호사가 헌신적으로 부인을 보호하며, 부인의 동창 산악회에 계속 참여
하는 희생과 봉사정신에 존경을 금치 못하고 있다.
지금은 협력의 시대다. 역할을 분담하여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산악회에 
참여하는 동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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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천진암(天眞菴)은 1779년 이벽(李檗) 25세, 정약용(丁若鏞)17세, 정약종(丁若鍾)19세, 
정약전(丁若銓) 21세,이승훈(李承薰) 22세, 이총억(李寵億)14세, 권철신(權哲身) 44세, 
등 주로 10代와 20代 젊은이들이 폐허가 된 천진암(天眞菴)에 모여서 天主敎 책을 읽고 
토론하였다. 이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다. 
조선천주교가 태동된 발상지이다. 
천진암(天眞菴)의 庵이 아니고 菴인 것은 위의 유독히 정약용 만이 천진암의 암자를 
풀로 가리울 암(菴)자를 썼던 것에서 연유한다. 그 이유는 南人계 자기네 젊은 선비들 
학자 호가 모두 稷菴 권일신, 鹿菴 권철신, 曠菴 이벽, 巽菴 정약전, 俟菴 丁若鏞, 
伏菴 李基讓, 順菴 安鼎福, 등에서처럼. 또한 은연중에 이곳 天眞菴은 자기네 南人 
學者들의 은거지(隱居地)요, 본거지(本據地)임을 암시하고 있다.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이 없이-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다.
1979~81년에는 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신일, 이승훈 등 한국천주교회의 초기 인물들의 
묘소가 이곳으로 이장되어 천주교 성지로서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출처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성지 홈페이지http://old.chonjinam.org/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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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레포츠 정규 모임날인 1토에 등산을 하게 돼 김회장이 광교레포츠에 합동 등산을 제의했는데 딱 한 분 이철주님이 대표로 나오셨다. 처음으로 버스가 분당에서 출발해 서울팀이 압구정동에서 기다린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압구정 팀이 예상 외로 많다. 김고문과 한영구님, 통신병 부부에 오랜만에 배정운 회장님, 최홍시(최택만)님, 윤봉용교수가 참석하셨다.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산 중 제일 높은 봉우리가 앵자봉이다. 마테오 현해수님이 천주교 전래에서부터 박해까지 천진암의 역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준다. 이벽, 이승훈을 포함한 5분 성현의 묘소가 있고 1993년에 건축을 시작해 100년 후에 완공할 ‘100년 성당’도 있다. 모든 공사를 자기 임기 내 완공하려고 졸속을 일삼는 꼴만 보고 살아온 터에 당대에는 보지도 못할 공사를 추진한 것이 그 뜻만도 갸륵해 비신자인 기자도 일찍 10여년 전 방문 때 헌금을 한 바 있다.

10시 45분, 등산로 입구에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김고문이 코스 설명을 한다. 주차장 오른쪽 청소년수련장을 통과해 박석고개를 거쳐 앵자봉에 오른 다음 성현묘소가 있는 계곡으로 질러 내려올 계획이다. 천진암 골짜기를 크게 안고 도는 능선길이 보기에도 근사하다. 출발! 그런데 수련장 경비아저씨가 수련장은 출입금지라 통과할 수 없다며 소리봉을 거쳐 오르는 길을 알려준다. 앵자봉을 돌아 다시 내려오는데 3시간 내지 3시간 반이 걸릴 거라는 얘기도 한다. 김고문은 소리봉까지 가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테니 가다 중간에 빠질 수 있는지 보자고 한다. 예상 외로 산에 눈이 많지만 흙길이라 걷기 좋고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깊은 산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한 30분 올라가니 벌써 능선이다. 앵자봉까지 1시간 40분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소리봉을 바이패스해 30분은 단축한 것 같다는 김고문 말씀. 경사가 심하지 않은 오르막내리막을 반복하며 이어지는 능선길이 편안해 다들 코스 좋다고 싱글벙글.

12시 30분, 갈림길이 나왔는데 앵자봉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좌회전으로 표시돼 있어 당혹스럽다. 김고문은 지도와 방향표시가 잘못된 것 같으니 직진하자고 하는데 다른 등산객들이 모두 앵자봉 표시가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니 우리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보니 우리가 바이패스했다고 생각했던 소리봉이 바로 그 갈림길 옆에 있는 봉우리 였다. 안내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와, 김고문도 착각할 때 있다!

1시 30분, 앵자봉. 증명사진 찍고 천진암 성지도 조망한다. 앵자봉에서 조금 내려와 낙엽 덤불 위에서 점심 먹고 2시 하산 시작. 40분 정도면 천진암에 도착할 거란다. 가다 왼쪽으로 난 길이 있으면 무조건 좌회전하라는 김고문 지시를 새기며 걷는데 이정표가 나온다. 직진 방향으로는 천진암까지 1시간 35분, 그런데 왼쪽 방향으로 붙은 나무화살표에는 “등산로 아님”이라고 쓰여 있다. 다들 망설이고 있는데 김고문이 “‘등산로 아님’이란 곳으로 한두 번 가봤냐, 이런 걸 붙여 놓은 건 등산로가 있다는 증거”라며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앞장선다. 그렇지 않아도 천진암까지 1시간 35분이나 더 가야한다는 표지를 보고 실망하고 난감했던 대원들이 얼씨구나 따라 나선다. 그럼, 우리가 입산금지 개구멍 한두 번 들락거렸냐.

낙엽이 발목까지 빠지도록 쌓여있는 데다 길은 흔적도 없고 쏟아질 듯 가파른 내리막의 연속이다. 과연 이렇게 가도 되는지 슬슬 불안해진다. 윤교수와 임총장이 정찰대로 앞장서고 뒤의 일행은 기다렸다 앞에서 내려오라 하면 움직인다. 이러다 결국 길이 없어 다시 올라가게 되는 거 아냐? 오늘 또 오랜 만에 조난하는 거 아냐? 온갖 불길한 생각이 다 드는데 다행히 나무에 매달린 희미한 리본 한 개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다닌 흔적이 있는 걸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가파른 경사면을 벌벌 기며 한동안 내려오자 경사도 약간 완만해지고 길 비슷한 흔적도 보인다. 아, 이제 최소한 조난은 면하겠구나, 안심이 된다. 그냥 가라는 길로 갈 것이지 꼭 이렇게 해야 돼? 지가 무슨 십대라고, 이유 없는 반항도 아니고. 그런데 반성은커녕 다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이런 모험 언제까지 하겠나,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즐기자. 좋습니다 좋아요.

3시 30분, 얼음장 밑으로 봄이 오는 소리, 돌돌돌 개울물 소리가 정겹다. 드디어 천진암 경내로 들어선다. 李檗 聖祖 讀書處 라고 새긴 비석이 서있는 너른 숲속 공터에 이어 다섯 성현의 묘소가 나온다. 이정표가 가라는 대로 갔으면 다시 거꾸로 한참 걸어 올라와야 있는 이 성지를 보러 왔겠느냐, 역시 천주님이 우리를 이리로 인도하신 게 틀림없다. 우리의 모험은 항상 보상받는다(얼씨구!). 다섯 성현들은 대부분 20대, 30대, 40대에 순교하셨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그 굳건한 믿음은 어디서 나왔을까 새삼 감동으로 가슴이 서늘해진다. 마테오가 경건하게 큰절을 올린다.

성현 묘소에서 조금 더 내려오니 100년 성당 부지다. 아직 거대한 초석만 여기 저기 놓여있는 상태인데 설계도와 완성됐을 때의 성당모습이 사진으로 붙어 있다. 그런데 둥근 돌기둥은 서양식이고 기와를 올린 지붕은 한국식인 건물이 어딘가 국적불명이고 어색하다며 모두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김고문은 마테오에게 아는 신부 통해 설계를 바꾸라고까지 제안한다. 기왕 100년 걸쳐 지을 성당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건축물이 되기를 기대했는데 실망스럽다.

4시 주차장. 함께 점심이라도 하려고 미리와 기다리고 있던 조문제 광교레포츠 회장님이 다른 약속 때문에 못 만나고 되돌아가셨단다. 여기까지 와주신 성의가 감사하고 못 뵙고 가셔서 서운하다. 퇴촌에 있는 스파 Greenland로 목욕하러 간다. 회장님을 위해 김대장이 특별히 인터넷에서 알아본 스파다. 이런 시골구석에 어떻게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스파가 있을 수 있는지 불가사의하기만 한데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한 걸 보면 사람들이 많이 오는 모양이다. 가족단위 손님이 많단다. 아이들 데리고 기껏 이런 데서 하루 종일 보낸다는 게 한심하다.

그나저나 입장료가 무려 12,000원이다. 다양한 시설이 있는 것 같지만 우린 샤워만 할 건데 너무 비싸다. 경로할인이 30%라는데 매표소 여직원이 전원 신분증을 내라한다. 몇몇 남학생이 신분증을 보여주며 모두 40-41년생이라 고 설명했음에도 여직원은 회장님을 쳐다보며 그 나이로 믿을 수 없으니 신분증을 내라고 우긴다. 회장님이 버스에 두고 왔는데 버스가 저 아래로 내려가 버렸으니 그냥 믿어달라고 해도 절대로 안 된단다. 화가 난 회장님, “치아삐라!” 일갈. (“치아삐라”는 “집어치워라” 의 경상도 방언.) 밥을 안 먹을지언정 목욕은 해야 하는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뿔이 났으면 그렇게 말씀하셨겠는가. 남학생들은 이구동성 잘됐다, 그 돈만큼 장어나 더 먹자, 오히려 신났다. 아니 회장님, 젊어 보인다는데 왜 화를 냅니까. (박통신병) 나 같으면 그런 말 들으면 오늘 밥 산다. (김고문)

팔당호가 내려다보이는 석호집은 김고문의 30년 단골 장어구이집이다. 아직도 얼음으로 뒤덮여있는 호수의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갖가지 산나물 반찬을 곁들인 장어구이와 잡어매운탕으로 포식한다. 왜 다들 옛날 얘기만 하느냐는 이철주님 말끝에 영화얘기가 꽃을 피운다. 뜻밖에도 영화 팬들이 많다. 특히 임종홍님의 왕년의 명화에 대한 지식은 그 깊이와 넓이가 ‘우리시대 최고의 지식인"(Naver 검색 지식in) 뺨칠 정도다. 마음의 행로, 가스등, 오케이 목장의 결투, 제3의 사나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스토리는 물론 주연배우들 이름도 줄줄이 읊어댄다.

오랜만에 나타난 윤교수에게 그동안 왜 안 왔냐 물으니 그렇게 묻지 말고 오늘은 어떻게 나왔냐 물어야 한단다. 그리고 오늘 나온 이유는 산악회의 위기의식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란다. 위기의식? 산악회가 곧 광교레포츠에 M&A 당할 것 같은 위기의식이란다. 자기라도 나서서 도와야 될 것 같았단다. 감격해 눈물 난다. 회장님이 위기가 맞으니 앞으로 꼭 참석해 주세요 부탁한다. 윤교수의 불참 진짜 이유는 집(일산)이 멀어 새벽 출발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서이다. 청년 같은 체력을 보건대 아직 새벽잠이 많은 모양이다.

총무자리 떨려난 현해수 전총무가 섭섭했던지 ‘출발’담당으로 복귀해야겠다고 자청한다. 돌아온 현출발, 자기 마음대로 복귀하고 직권남용한다. “6시 20분, 출발!” ‘돌아온 현출발’이 가장 못마땅한 사람은 김영길대장이다. 앞으로 두 前現職 출발의 실랑이를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다음 토요일은 다시 정규 스케줄대로 2토 산행을 한다. 장소는 근교로 하되 구체적인 계획은 김대장이 추후통보. 3월 4토에는 청평의 호명산을 갈 예정임도 미리 알려드린다. 참가자(15명): 김숭자(장원찬), 김영길, 김윤기, 김종남, 박정수(노순옥), 배정운, 윤봉용, 이철주, 임종수, 임종홍, 최택만, 한영구, 현해수. (노순옥 기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산행기와 사진은 서울상대1.7동기회 Daum cafe 산악회 칼럼에 올린 것을 이 곳에 전재한 것이다. 등산 경험이 많은 김고문의 판단이 빛났다. 경사가 급한 하산길이라 모처럼 참여한 한 동문은 후유증으로 무릎 통증을 호소했다. 대부분의 회원은 1시간이나 단축한 급경사 지름길 하산에 찬사를 보냈다. 가끔 순경(順境) 보다는 역경(逆境)속에서의 산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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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한영구가 촬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