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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방

◆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선생님 추모기도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선생님 추모기도

 

7월 11일 오전 7시 30분부터 8시15분까지 45분간 기도

몰입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한 기도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기도를 위한 영상창이 비교적 흰회색에 가까워 선명한 편입니다.

묵주기도5단 영광의 신비 기도를 하기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분심(分心)을 막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영상을 떠올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가끔 기도 말씀 하나하나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정확한 말로 주님께 기도를 드리려고 노력하면 역시 분심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영상과 말씀에 집중하는 것을 교대로 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나이 탓인지 이번에도 사도신경을 빠트렸고 1단에서는 영광송도 빠트렸습니다. 기도를 자주 드리면 빠트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항상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는 천천히 합니다. 영상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의미를 생각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번 묵주기도를 드릴 때는 22도 각도에서는 영상을 떠올려 바라보고, 수평각도에서는 기도의 말씀, 글자 하나하나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되풀이 했습니다.)

 

묵주기도 5단 영광의 신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다시 기도의 창에 예수님의 영상을 떠올렸습니다.

 

주님 지난 7월 8일과 9일에 흑산도와 홍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장마철 우기인데도 저희 24명이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비를 맞지 않고 여행을 하였습니다.

다만 비안개로 흑산도에서는 아름다운 경치를 제대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산악회 회원들이 모두 착하고 겸손하고 서로 존중할 줄 아는 겸손한 분들이라

비를 피해가는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선생님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산어보라는 책을 지으셔서 이곳에 자산문화관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손암 선생님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그것을 읽으면서 비로소 좀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92.7km, 200리가 넘게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논이 없어 쌀을 주식으로 먹지 못하고 생활을 하셨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나 남해 바다 섬들은 쌀을 주식으로 생활할 수 없는 곳이라 유배지로 택한 것도 같습니다.

손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마음의 안정을 찾으셨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님의 기도 중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생각이 났습니다.

유배를 보낸 분 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여러 번 드리셨을 것입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양자 간의 대등관계에서 벗어나 용서하는 사람이

더 우위(優位)에 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배를 보낸 분 들을 미워하지 않게 되고

불쌍하게 여기게 되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의 기도를 여러 번 되풀이 할수록 용서하는 사람의 인격은 높아져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 것입니다.

용서하고 나서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드리면,

죄를 용서하여 주시면서 더 큰 마음의 평화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큰 은혜도 주셨을 것입니다.

저는 용서가 죄의 참회보다도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15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시고 이곳에서 58세로 짧은 생애를 마치신 것이 안타깝습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의 가장 크고 중요한 가르침이며,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다시금 또 깨달았습니다.

103위 성인은 물론 정약전 선생님 등 박해를 받아

일찍 선종하신 많은 천주교 신자 분 들 모두는

기도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거나,

주님의 말씀을 들으신 분들이라고 여겨집니다.

 

주님, 이번 여행길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베풀어 주신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님,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님,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시 주님의 기도를 새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드리고, 성모송, 영광송을 새로운 느낌으로 정성을 드려 올리면서 모든 기도를 마쳤습니다. 몰입의 단계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심호흡을 하고 눈을 떴습니다. 십자고상을 새로운 느낌으로 바라보면서 크게 성호를 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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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 정약전 선생은 지금의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11.42㎢)와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면적 19.7 km², 우이도와의 거리 47km)를 오가면서 약 15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고, 결국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100리 뱃길을 오가며 생활을 하였으니 고생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당시에는 우이도를 소흑산도라고 부르면서 흑산도와 같은 권역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입니다. 유배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면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마을에서 '복성재'라고 하는 서당을 차리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몇몇 저서들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서적인 '자산어보'라고 하겠습니다.

 

자산어보에서 '玆山'이라는 말은 흑산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산어보는 흑산도 주변의 해양 생태계를 조사하여 약 220여 종의 어류에 대한 설명을 저술 해놓은 어류백과사전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의 수산기록으로는 최초라고 할 수 있고, 오늘날의 백과사전과 비교 해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글의  출처 : mokpo.kbs.co.kr/bbs/ezboard 

 

 

 정약전 선생님 초상화

 

흑산도에 있는 자산 문화원

 

우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