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산 186-21번지에 있는 안성 3.1 운동기념관
으로 향하였다. 안내인 말에 의하면 재판기록에서 근거를 찾아 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33인 대표
중 29인이 태화관에 모여 33인 대표 손병희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파고다공원에는 33인의 민족
대표가 예정을 바꾸어 나오지 않아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군중 속에서 “대한독립만세”가
시작되었다. 독립운동과 만세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안성 3.1 운동기념관
3.1독립만세운동의 상징적인물이 왜 유관순(1904~1920)인가는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이해가 간다.
예수교 공주교회(公州敎會) 부인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16세의 소녀로 시위대열에 끼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이 운동의 전국적인 파급
의 일익을 담당키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천안, 연기, 청주, 진천등지의
학교와 교회를 방문하면서 시위운동을 계획, 음력 3월 1일 일제히 궐기하였다.
삼일운동은 당시의 조선민중의 뿌리깊은 독립의지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이름모를 수많은 사람
들이 하나로 합류한 민족운동이다.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리우는 유관순은 당시 16세의 이화
학당의 학생으로서 고향인 천안시 목천면 지평리로 내려가 수천명의 시위군중의 앞장을 섰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은 헌병의 발포로 즉사하고 어머니역시 참살당하고 말았다. 유관순
은 체포되어 오빠 관옥과 함께 유치된 뒤에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그녀의 옥중 법정투쟁은 유명
한일화로 남아있다.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은 일본인이다. 그런 일본인에게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있단말인가?"라는
주장을 시종 굽히지 않았다. "죄를 뉘우치고 제국신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면 관대한 처분
을 내리겠다."는 재판관의 회유에 "강도를 몰아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살아서도 독립만세 죽어서도 독립만세다."라며 한 걸음도 물러설 줄 몰랐다. "너희들 조센징이
무슨 독립이란 말이냐."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한 재판장의 검사를 향해서 의자를 집어던지기
도 하였다. 날밤으로 계속된 고문은 그녀의 죽음을 앞당겼다. 그녀의 밥에다가 모래와 쇳가루
를 섞어서 먹게했다. 머리에는 콜타르를 칠해 머리 전체를 잡아당기고, 가발처럼 머리가죽을
벗겨내기도 하였다. 겨드랑이와 음부의 털도 불에 달군 인두로 태워 버렸다. 코와 귀는 면도날
로 잘리우고 손톱, 발톱은 몽땅 집게로 뽑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유관순은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20년 10월 12일 그처럼 가혹
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그녀는 끝내 숨지고 말았다.
3.1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된 운동이었다. 안성에서도 3월11일부터 4월 2일까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다만 유관순처럼 위대한 지도자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뒤늦게 재판
기록을 발견하여 2001년 11월에 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전시관내에 재판형량 게시물을 보면
2년3~4개월 실형선고를 받은 분들이 여려분이다.손병희 선생이 3년형을 받았으므로 비교해
보면 독립만세운동이 격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에 안성문화관광 홈페이지에 있는 글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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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성의 3.1운동은
안성의 3.1운동은 3월 11일 읍내에서 시작되어 4월 1일 최고조에 다다르게 된다. 우리나라
전국에서 3.1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안성의 3.1운동이 중요한 것은 그 운동이 일제에 의해
평안북도 의주군, 황해도 수안군과 함께 “전국 3대 실력 항쟁지” 중의 한곳으로 지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대표 33인의 재판에 원용될 정도로 의미있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원곡, 양성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연결,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닌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2000여명의 전 주민이 참가하여 순국 24위, 피검 361명, 옥고 127명, 태형 42명등의
희생자를 냈고, 1993년 현재 100명이 각종 훈장을 받았으면, 고개이름까지 만세고개로 바뀔
만큼 뜻깊은 만세운동이었다
기념관 입구
2. 안성 3.1운동의 전개과정
안성에서의 3ㆍ1 운동은 3월 11일에 읍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상인들은
철시하여 이에 동조하였으나 일제 경찰이 출동하자 해산하는 비교적 평화적인
분위기로 시작되었지만, 이후의 산발적인 만세운동과 서울에서 귀향한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점차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식은 사회전면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3월 29일에서 4월 2일까지의 안성읍과 4월 2일 일죽,
죽산 시장에서 연이은 만세운동이 있었고, 심지어 군청으로 몰려가 수 천명이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으며, 안성지역의 곳곳에서 뒷산이나 앞산에 올라가 횃불
을 신호로 일제히 결집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산발적인 시위를 극복하고 실력투쟁으로 진전시킨 것이 4월 1일의 원곡, 양성지역
독립운동인데, 원곡, 양성 역시 3월 10일 이후 처음에는 산발적인 만세운동으로 시작하였
습니다. 그러나 원곡면은 사전 연락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킨 뒤 3월 28일 내가천리 이시련
(李時連) 집에 모여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습니다. 이어 마을 단위로 봉화시위를
시행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 후 4월 1일 1,000여명이 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면장인 남길우
(南吉祐)와 서기 정종두(鄭鍾斗)에게 태극기를 주어 만세를 부르게 한 후 선두에 세워
양성으로 향해 시위행진을 벌인 것입니다.
기념관 조각작품
시위군중은 각각 각목과 농기구 등을 지참하여 양성면으로 진행하던 중 접경지역
인 성은고개(만세고개)에 이르러 그날 시위운동을 전개했던 양성면민 1,000여명과
합류하여 시위대는 2,000여명으로 늘어나 대단한 세력을 형성한 것입니다.
시위대가 주재소로 향해 돌진하자 순사와 순사보는 그 기세에 압도되어 피신하기에
급급했으며, 분노한 군중은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차례로 파괴 방화하고,
일본인 잡화상과 고리대금업자의 가옥을 파괴하였으며, 일제 경찰과 그 주구들의
탄압에 대비하여 이곳으로 통하는 교량을 차례로 파괴한 후 일단 산 속으로 피신하
였습니다.
기념관 조각작품
일제는 현지의 경찰로는 사태를 수습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조선 주차군 제40여단
79연대 소속장교와 사병 30여명을 지원 받아 주동자 검거에 나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가족들을 협박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이에 회유책
으로 4월 19일 현 원곡초등학교 뒷산에 모아놓고 모든 사실을 불문에 붙이고 용서
한다고 회유책을 사용했는데, 일제의 공포에 짓눌렸던 가족들은 일제의 회유책을
사실로 믿고, 주동자들을 설득하여 원곡초등학교에 모이도록 하자 일제는 총검으로
사방을 포위하여 도주하는 자는 사살(현장 순국3명)하는 끔찍한 만행을 자행한 것입
니다. 또 6월 1일에도 하사 이하 36명을 투입하여 나머지 남은 시위세력 색출에 나
섰는데 이들은 가족들을 협박함은 물론이고 민가에 난입하여 방화 약탈 등을 자행
했습니다. 이로 인해 원곡,양성, 주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
니다.
기념관 조각작품
3. 3.1운동 기념관은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산 186-21번지의 기념관은 만세고개 정상에 위치
하며 광복사, 3.1운동 기념탑, 전시관, 무궁화 동산 등이 조성되어 있다.
3.1운동의 역사를 되새기고 안성지역의 순국 선열들의 희생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이 지역의 성역화 사업으로 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광복사는 3.1운동 당시 안성지역에서 순국하거나 고문을 당하신 분들의 넋을
위로 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현재 이곳에는 순국선열 25위와 애국
지사 194위의 위폐가 봉안되어 있다.
3.1운동 기념탑은 태극의 4쾌를 통해 우리 민족의 영원성을 상징하며, 태극기는
국권을 회복하고 산화한 선열을 위한 휘장이며 탑 측면의 부조는 양민의 학살,
주재소 및 통신시설 파괴등의 의거, 새시대의 개척, 역사적 항쟁사가 구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궁화 동산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나라꽃인 무궁화를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횃불의 모양을 하고 있다.
전시관은 지상 2층으로 연면적 374평인데 3.1운동 당시 안성지역의 만세운동과
관련한 유물과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펼쳐진 시위운동 및
역사적인 자료를 실물전시, 모형, 체험관과 영상물들을 통해서 관람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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