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동쪽 끝에 위치한 일죽면 북쪽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안성시 남쪽 끝에 자리한 서운면 땅을
처음 밟아본다. 서운면(瑞雲面), 상서로운 구름이 상징인 면, 문학적이며 낭만적이다. 그래서 바우덕이
라는 천민출신 예능인이 태어나 존경을 받는 가 보다.
평야와 얕은 산만 보인다. 포도재배지역이 많다. 공장이 모여있는 공단지역도 있다. 공장이 많이 보여
일죽면 보다 발전한 지역같다. 일죽은 4차선도로가 있어 교통은 이곳 보다 편리하다. 왼쪽으로 이곳에
서 동북쪽에 위치한 금강면과 연결된 차령산맥줄기가 보인다. 차령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갔다.
산 넘어 가 충북 진천군 백곡면이다. 내 고향 마을 북쪽에 있는 해발 310m의 노승산(老僧山)을 보고
자란 나에게는 이곳 산이 훨씬 높아 보인다. 청룡사가 있는 서운산이 해발 547.4m이다. 500m 이상의
높은 산이 연결된 차령산맥줄기에 자리 잡은 서운면은 산골마을에 속한다. 거의 평평한 길 끝에 청룡사
가 있다. 입구까지 버스가 들어간다. 절도 산 입구 오른쪽 약간 높은 산자락에 있다. 다음 스케쥴 때문
에 서운산 계곡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절만 구경하고 돌아가야 한다. 아쉽다.
남북으로 흐르는
개울가 오른쪽에는 절이 있고 왼쪽에는 민가가 있다. 왼쪽민가가 예전에 남사당 마을이었다고 한다.
개울가에는 고목 한 그루와 돌무더기가 있어 이채롭다. 오른쪽으로 높지 않은 계단위에 대갓집
솟을대문을 연상시키는 일주문을 거처 청룡사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절과는 달리 청룡사 일주문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몸집이 크고 무서워 보이는 사천왕상이 없고 사천왕
상이 있을 자리에 조그만 쪽방이 달려 있다.절이 서향이다. 석가모니 출생지인 서방을 향하여 있어 극락왕
생을 기원하는 내세지향적인 절이다.
1265년(고려 원종 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 고쳐 불렀다. 상서로운 구름이 머무는 산에
푸른 용이 노니는 곳, 고려말 나옹 스님이 청룡사를 중창하면서 푸른 용이오색찬란한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이름을 서운산 청룡사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내생각에는 청룡사의 뒷산 서운
산의 차령산맥줄기가 서남향으로 뻗어 있어 좌청룡 우백호로 분류하는 풍수지리의 관점에서 보면 좌청룡에
해당하므로 청룡사라고 이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초라해보이는 삼층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법당내에는 1674년(조선 현종 15)에 만든 5톤 청동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
지주까지 마련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무결 그대로 살려 기둥
으로 세운 것이 특징이다. 생전 처음 보는 가공안한 나무기둥의 모습이다. 정면보다는 옆모습을 보면
뒤틀리고 휘어진 생김새대로의 목재를 다듬어 기둥을 세웠음을 실감할 수 있다. 더구나 특이한 것은
대웅전 정면은 3칸이고 옆면은 4칸으로 한 칸이 더 많은 흔치않은 건물이다.
경내 종각안에 있는 청동종의 모습이 너무 깨끗하여 사진에 담았다.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예능을 익힌곳 청룡사, 천민출신의 바우덕이가 지금은 존경을 받는 예능인
이다. 인간평등 실현의 표본이다. 예능의 고장 안성을 대표할 인물의 한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안성 바우덕이 남사당패가 앞으로 세계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유명해질 바우덕이, 안성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고 더욱 호기심을 갖게 한다. 청룡사는 남사당패의 본거지이다. 마을가까이 있어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사찰이었다.불쌍한 천민 남사당패에게 대자대비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청룡사
스님들의 공덕에 머리숙여 깊은 감사의 뜻을 보낸다.
내세지향적인 절의 특성이 그대로 실현되어 예능의 달인 바우덕이는 사망 후 130여년이 지난 지금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기예를 전수받은 후배들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남사당패들은 이 청룡사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절에서 발급해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과 전국의 저자
거리를 떠돌며 기예를 팔아먹으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바닥인생 들 이었다. 백여 년 전 안성에는 개다
리패, 심선옥패, 오명선패, 안성복만이패, 이원보패, 안성원육덕패 같은 남사당패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우덕이”패였다고 전한다.
바우덕이(성은 김이고 이름은 암덕-岩德-이기 때문에 岩을 바위로 풀어 바우덕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는 1848년 안성에서 출생해 서운면 청룡사에 기거하다 다섯 살 때 안성남사당패에 들어갔다. 청룡사에서
그가 스님 어깨 너머로 배운 염불을 외면 구경꾼들이 자지러지며 넘어갈 정도로 타고난 끼가 대단했다
한다. 꼭 10년 뒤인 열다섯 나이에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어 외줄을 타는 허궁잽이
(외줄 타는 광대를 일컫는 말)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바우덕이는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유일한 여성꼭두쇠였는데 미모가 뛰어나서 많은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미모뿐만 아니라 노래 가락 솜씨도 일품이었으며 특히 바람에 휘날리는 듯 하는
줄타기 솜씨가 당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녀의 기예솜씨는 장안에까지 알려져 경복궁
중건 때는 왕과 대신들 앞에서 기예를 펼치는 영광을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뛰어난 솜씨에 감탄한
대원군이 정3품관에 주어지는 옥관자(망건 좌우에 다는옥장식품)를 하사했다고 하니 신분사회인 당시
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파격적인 대우였다. 미모와 출중한 기예솜씨로 바우덕이패의 공연장에는 사
람들이 많이 몰려 인기가 최고였는데 지금도바우덕이 노래 한 자락이 전해지고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또한 바우덕이 타령의 한 대목이 전해내려오고 있어 소개한다.
덕아 덕아 바우덕아 바람에 손목 잡혀 이 세상에 왔느냐
길 따라 가도 편히 못가는 인생 어찌하여 너는 외줄을 타려 하느냐
청룡사 푸른 하늘 멍텅구리 구름같이 갈 곳 없어도
남사당이 좋아 바람 부는 청춘아
덕아 덕아 바우덕아
신명에 몸이 끌려 저 산 넘어 왔느냐
밤이슬 맞으며 천대 구박 받아도
어찌하여 너는 외줄을 타려 하느냐
비봉산 깊은 골짝 싸늘한 얼음같이
갈 곳 없어도 꼭두쇠가 좋아 떠나가는 청춘아
그런데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그 바우덕이는 오래 살지 못하고 23세의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요절
했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남편은 42세의 역시 남사당패였는데 그녀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날마다 근처의 바위에 올라가 나팔을 불고 황소울음을 울어 청룡리 주변에는 나팔바위, 울바위,
떵뚱바위 같은 바위 이름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바우덕이의 시신은 어려서 자랐던 청룡사 부근에
묻혔으나 묘비를 세우지 않아 어느 곳인지 짐작할수 없었지만 이후 바우덕이 혼을 기리는 계승자들이
청룡사에 추모비를 세우자 이듬해에 추모비 옆에 저절로 작은 봉분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안성남사당패는 지난 28회 아테네 올림픽 때 그리스 아테네시 중심가인 오므니아 광장에서 남사당
풍물을 선뵈며 전세계인의 시선을 모았다. 당시 그리스 국영방송인 ERT는 생방송으로 현장을 방송
하며 바우덕이 풍물패에 대해 “세계인의 이목을 끈 색다른 공연으로 아테네 시민들은 이들로 인해
올림픽 행사에 더 큰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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