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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충북 괴산군 연풍순교성지 순례기

천주교 영세를 받아 신자가 된지 불과 2년 반 밖에 안 되는 나는,절두산 성지순례는 두 번이
나 했다. 그러나 두 번째 갔을 때에 박용성 형제의 특별한 배려로 그곳에 있는 박물관을 연세
가 많으신 책임자로부터 직접 설명을 들으며 보아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이번 영풍순교성지
순례가 나에게는 두 번째 성지순례인 셈이다.
5월 8일(화) 대학동문 신우회 25명이 관광버스로 서울에서 2시간 반이 채 못 걸려 영풍성지
에 도착했다. 성당이 아닌 경당(敬堂) 건물 이라 지붕에 십자가가 없는 것인가? 십자가가 없
어 일반 큰 가정집 같다. 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와 성지 느티나무 아래에 마련된 긴 나무의
자에앉아  이곳 담임 오동영 모세 신부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참고]성당은 천주교회(가톨릭교회)의 사제가 상주하는 곳을 말한다.상주 안 하는 곳은 경
당(敬堂,라:oratorium,영:oratory)이나 공소(公所)라고 부른다.
 오동명 모세 신부님 집전으로 미사를 드림.
천주교 신자가 되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이 겸손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신부님도
힘을 빼라는 말씀을 한다. 아주 공감이 간다. 자존심을 버리고,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고, 온
순하고 부드럽게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데 참 실천하기가 어렵다. 물질적인 봉사, 정신적인 
봉사, 자기의 특기가 남에게 도움이 되면 기꺼이 대가 없이 봉사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는 것을 알면서도 게을리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취미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성경 
교리 공부나 봉사활동에 소홀하여 천주교에 관하여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나에게는 이번 성
지순례가 큰 도움이 되었다.이곳을 추천하여 올 수있는 계기를 마련한 이화진 형제에게 감사
를 드린다.
 경당 앞에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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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군 남동쪽 끝에 연풍면이 나
온다. 해발 1,017미터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 분지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
다. 연풍은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가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
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교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연풍은 전체가 소백 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군과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 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
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 됐었다.
남부 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 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 1·2·3관
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
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최양업 신부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 13년간의 각고 끝
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운다. 
은신처로서 새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그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남짓 사목한 데 비해 오랫동
안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읍 진안리의 어느 주막
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했다는 최 신부는 생전에 쉴 새 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인 배
론 신학당 뒷산에 옮겨져 묻힌다.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가(1811-1866년)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길에 나섰다가 상경길에 한 선비를 만나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서적 
한 권을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3년 동안의 벙어리 흉내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킨
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두고 성서 번역과 사전 편
찬에 종사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신앙에 눈뜬 뒤 그는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주교
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
황청의 허락을 못했다. 병인박해(1866년) 때는 다블뤼 안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칼을 받아 순교한다. 
연풍에는 또 한가지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잃
었다. 천신만고로 세 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레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
다.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레 신부가 연풍을 지나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돼 도
망 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
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공소로 옛날 향청 건물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
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 하지
만 매입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3개
나 발견됐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 됐
다. 1979년에는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 1982년 연풍성지로 이
장했다. 연풍성지와 관련하여 선종하신 오기선(요셉) 신부님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매년 2만여 명씩 순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함께 순교 현
양비가 건립돼 있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국내 최대의 십자가
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제관을 비롯한 기념관 건립이 진행되었다.
위의 글은 국내여향정보 http://myhome.hanafos.com/~1004tour/catoric/yuenphung.htm에 실
린 글에 내가 찍은 사진을 겻드린 것이다. 그곳 오동영 모세 신부님의 설명과 가장 비슷하
여  조금 수정 전재한 것이오니 양해주시기 바란다. 
아래 글은 한명수 교수의 카페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일부를 옮긴 것이다.
나도 순교할 수 있을까? 순교자들처럼 피와 살이 튀는 끔찍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님을 배
반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을까?
순교도 하느님 은혜인 것 같다. 아픈 걸 못참는 내가 그 고통을 이겨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런 순간이 닥치면 하느님 은혜를 청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교회 순교자들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 시기에 천주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목숨이 경
각에 달린 순간에도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외쳤을까. 한 교회사가가 "조선 
관가의 순교자 심문기록에서 '사학죄인(邪學罪人) ○○○'라는 말만 빼면 그 자체가 훌륭한 
교리서"라고 감탄했는데 나 역시 순교자 증언록을 읽을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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